영화 · 2026

올 그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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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뜨리고 남은 사람과 터뜨리고 떠난 사람

조용한근육맨· 2026. 11. 03.· 3,330자

감독이 이 영화를 만들면서 참고했다고 밝힌 작품은 1999년의 「파이트 클럽」이다. 일본 청춘 영화의 문법은 일부러 보지 않았고, 건조하고 차가운 영화를 목표로 했다고 한다. 영화 안에도 그 흔적이 있다. 세 여고생이 자기들 동호회의 규칙을 읊는 장면이 있는데, 첫 규칙은 동호회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파이트 클럽」의 첫 규칙을 그대로 빌린 농담이다. 그러니 두 작품을 나란히 놓는 것은 억지가 아니라 영화가 먼저 청한 일이다.

질문은 이것이다. 숨 막히는 일상에서 비밀 클럽을 만든 사람들이 끝내 무언가를 터뜨릴 때, 두 영화는 각각 무엇을 터뜨리기로 했는가.

파이트 클럽

먼저 비교 대상의 사실부터 적는다. 「파이트 클럽」은 데이비드 핀처가 연출하고 짐 울스가 척 팔라닉의 1996년 소설을 각본으로 옮긴 139분짜리 영화다. 에드워드 노튼이 이름 없는 화자를, 브래드 피트가 타일러 더든을, 헬레나 본햄 카터가 말라 싱어를 맡았다. 1999년 베니스 영화제에서 처음 상영됐고 같은 해 10월 미국에서 개봉했다.

줄거리는 이렇다. 불면증에 시달리는 보험사 직원이 출장길 비행기에서 비누 판매원 타일러를 만난다. 화자의 아파트가 폭발로 날아가고, 그는 타일러의 집에 얹혀살기 시작한다. 두 사람은 주차장에서 서로를 때리는 일로 시작해 지하 격투 클럽을 연다. 남자들이 자기 삶의 통제권을 되찾는 방법이라는 것이 이 클럽의 명분이다. 클럽은 점점 커져 「프로젝트 메이헴」이라는 조직이 되고, 조직은 소비 사회를 겨눈 파괴 행위를 벌이다가 끝내 신용카드 회사 건물들을 폭파할 계획을 세운다. 화자는 타일러가 자기 안에서 갈라져 나온 또 다른 인격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를 없애려고 자기 뺨에 총을 쏜다. 마지막 장면에서 화자는 말라와 손을 잡은 채 창밖의 건물들이 무너지는 것을 본다.

정리하면 이 영화의 폭발은 세 가지 성격을 가진다. 첫째, 겨눈 곳이 바깥이다. 신용 기록이 쌓인 건물, 즉 세상의 장부다. 둘째, 폭발을 계획한 사람과 막으려는 사람이 같은 몸 안에 있다. 셋째, 주인공은 그 자리에 남아서 무너지는 것을 끝까지 본다.

올 그린스 스틸컷

올 그린스

「올 그린스」는 코야마 타카시가 각본을 쓰고 연출한 119분짜리 일본 영화다. 나미키 도가 스물한 살에 써서 제28회 마쓰모토 세이초상을 받은 소설이 원작이고, 2025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처음 상영된 뒤 올해 1월 일본, 5월 한국에서 개봉했다. 무대는 이바라키현 도카이무라. 감독의 고향이자 1999년 핵연료 처리 시설 사고로 이름이 알려진 마을이다.

이곳 공업고등학교에 다니는 세 여학생이 있다. 래퍼를 꿈꾸는 히데미, 육상부 에이스였다가 실습 중 사고로 새끼손가락을 잃은 미루쿠, 농가의 후계자로 묶일 처지인 만화가 지망생 이와쿠마. 셋 다 이 마을을 나가고 싶어 하지만 나갈 돈이 없다. 히데미가 어떤 사건을 겪고 대마 씨앗을 손에 넣으면서, 셋은 폐부된 원예부의 옥상 비닐하우스를 되살려 「원예 동호회」라는 간판을 달고 대마를 키우기 시작한다. 동호회 이름이 「올 그린스」다. 수확한 뒤에는 같은 학교 남학생 둘을 판매책으로 두고 인터넷으로 판다.

영화에는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건네는 말이 몇 개 있다. 담임 교사는 히데미의 랩을 두고, 좋네 랩, 랩이란 지역을 리스펙트하는 거잖아, 하는 식으로 말한다. 아이들이 그 지역을 떠나려고 랩을 하고 대마를 키운다는 것을 모르는 채로 하는 말이다. 이 어긋남이 영화의 온도다. 세상은 아이들을 막지 않는다. 그저 못 알아들을 뿐이다.

그리고 졸업식 날이 온다. 씨앗을 빼앗겼던 남자 사토가 돌아와 모은 돈의 절반을 요구한다. 히데미는 혼자 옥상에 올라가 비닐하우스에 기름을 붓고 남자를 불러낸다. 남자가 하우스 안에 들어서자 불을 붙인다. 폭발이 일어나고, 대마 연기가 졸업식이 열리는 체육관으로 흘러들어 학생과 교사가 모두 취해 웃고 춤춘다. 히데미는 옥상에서 뛰어내려 자전거 보관소 지붕에 떨어지고, 일어나 교문 밖으로 달려 나간다. 사토는 대마 재배로 경찰에 잡힌다.

영화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세 사람의 그 뒤 인생이 자막으로 나온다. 히데미는 고향에 주저앉고, 미루쿠는 파칭코 사장과 결혼하고, 이와쿠마는 데뷔작 이후 다음 작품이 없다. 그 자막을 미루쿠가 웃는 얼굴로 뒤집는다. 그럴 리가 있냐, 바보들아. 그 외침으로 영화가 끝난다.

올 그린스 포스터

무엇을 터뜨렸는가

두 영화는 같은 문제에서 출발한다. 반복되는 하루, 거기서 나갈 방법이 보이지 않는 사람, 규칙을 가진 비밀 모임, 그리고 폭발. 감독은 아이들이 마을을 떠나고 싶어 하는 동기를 설명하면서 「계속 같은 일을 반복하는 삶에 대한 공포」를 말했다. 「파이트 클럽」의 화자가 앓던 것과 같은 병이다. 그런데 터뜨리는 대상이 정반대다.

「파이트 클럽」은 바깥을 터뜨린다. 세상의 장부를 지우면 자기가 자유로워진다는 논리다. 그래서 주인공은 떠나지 않는다. 무너지는 건물 앞에 서서 그것을 본다. 폭발이 곧 발언이기 때문이다. 「올 그린스」는 안을 터뜨린다. 히데미가 불을 지른 것은 세상이 아니라 자기들이 키운 비닐하우스, 마을을 나갈 유일한 밑천이다. 이 폭발은 발언이 아니라 증거 인멸이고, 위협을 끝내는 수단이고, 무엇보다 떠나기 위한 핑계다. 그래서 주인공은 남아서 보지 않는다. 뛰어내리고, 달린다.

이 차이를 승패로 읽고 싶은 유혹이 있다. 「파이트 클럽」은 세상을 상대했고 「올 그린스」는 도망쳤다고. 나는 그렇게 읽지 않는다. 두 영화는 다른 것을 택했을 뿐이다. 전자는 분노를 택했고, 분노는 머물러야 완성된다. 후자는 웃음을 택했고, 웃음은 떠나야 완성된다. 연기가 체육관을 채우고 모두가 웃는 장면은, 세상을 바꾸는 장면이 아니라 세상이 잠깐 아이들을 못 쫓아오게 만드는 장면이다. 그 틈에 한 명이 빠져나간다.

「파이트 클럽」 쪽이 더 해낸 것도 있다. 폭발의 대가를 주인공의 몸으로 치르게 했다는 점이다. 타일러를 없애려면 자기 뺨에 총을 쏴야 한다. 「올 그린스」는 그 대가를 끝까지 유보한다. 자막은 셋의 미래를 어둡게 적어 놓고, 미루쿠의 외침이 그것을 지운다. 영화는 어느 쪽이 진짜인지 끝내 정해 주지 않는다. 이것을 회피로 볼 수도 있다. 반대 의견을 성실하게 적자면, 범죄극의 정밀함을 청춘극의 에너지와 맞바꾼 영화라는 지적은 타당하다. 폭발 이후에 셋이 치를 값을 영화는 보여 주지 않는다. 자막이 있을 뿐이고, 그 자막마저 지워진다.

그러나 나는 그 유보가 이 영화의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파이트 클럽」의 폭발은 어른의 폭발이다. 결과를 받아들일 사람이 그 자리에 서 있다. 「올 그린스」의 폭발은 고등학생의 폭발이다. 결과를 받아들이기 전에 일단 교문 밖으로 나가 보는 것. 어느 쪽이 더 정직한지는 보는 사람의 나이에 따라 다를 것이다. 터뜨리고 남은 사람과 터뜨리고 떠난 사람, 둘 중 누구의 다음 날을 더 알고 싶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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