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2026
올 그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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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늦게 뜨는 영화에게 묻는 일곱 가지
질문에서 시작하겠다. 이 영화는 제목이 뜨기까지 삼십 분이 넘게 걸린다. 그동안 나는 어디에 앉아 있었던 것일까. 아래 일곱 개의 질문에 나는 답을 쓰지 않았다. 답을 몰라서가 아니라, 답을 적는 순간 질문이 생긴 자리가 지워질 것 같아서다. 그래서 질문마다 그것이 생긴 장면을 붙여 둔다. 이바라키현의 바닷가 마을, 공업고등학교에 다니는 세 여학생, 옥상의 비닐하우스. 그 정도만 알고 읽어도 된다.
1. 왜 제목은 세 사람이 함께 달리기 시작한 뒤에야 뜨는가
영화는 학교와 집과 역 앞을 오래 보여 준다. 래퍼가 되고 싶은 아이, 실습 중 사고로 손가락을 잃은 아이, 농가의 뒤를 이어야 하는 아이. 각자의 자리에서 숨이 막히는 시간이 삼십 분 넘게 이어지고, 셋이 경찰에게서 달아나며 밤길을 함께 달리기 시작할 무렵에야 「올 그린스」라는 글자가 화면에 얹힌다. 그러니까 이 영화의 제목은 세 사람이 한 덩어리가 되기 전에는 붙을 수 없었던 것인가. 아니면 제목이 뜨기 전까지의 시간은 이 영화가 아니라고, 영화가 스스로 선을 긋는 것인가. 어느 쪽이든 나는 그 삼십 분 동안 관객이 아니라 대기실에 앉은 사람 같았다.
2. 「노 페인 노 게인」이라는 말은 누가 치른 값을 말하는가
펜스를 따라 걷는 두 사람의 대화에 그 말이 나온다. 인생은 고통 없이는 얻는 것도 없다는,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말이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고통은 이미 지불된 뒤다. 한 아이는 집에서 맞고, 한 아이는 실습실에서 새끼손가락을 잃었고, 한 아이는 자기가 그리는 것 대신 집안의 밭을 물려받게 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 말은 앞으로의 다짐인가, 이미 치른 값에 대한 영수증을 달라는 요구인가. 값을 먼저 낸 사람에게 세상은 무엇을 내줄 의무가 있는가. 영화는 그 질문을 펜스 옆에 세워 두고 지나간다.
3. 느려진 화면은 누구의 시간이었는가
스케이트보드를 탄 아이가 밤의 교차로를 지난다. 화면이 느려진다. 청춘 영화라면 음악이 깔릴 자리다. 그 느린 화면을 끊는 것은 차에 치이는 여자다. 바람난 남편을 해치려던 여자였다는 사정이 뒤에 붙는다. 한 일본 감상글은 이 여자를 이 마을이 아이들에게 미리 보여 주는 절망의 표본이라고 읽었다. 나는 조금 다른 것이 궁금하다. 느려진 화면은 보드를 타는 아이의 시간이었는가, 그것을 보는 카메라의 시간이었는가. 이 영화는 청춘 영화의 속도를 한 번 보여 주고 그 자리에서 거두어 간다. 거두어 갈 것을 왜 잠깐이라도 보여 주었는가.
4. 왜 가장 청춘 영화 같은 장면은 범죄가 시작된 뒤에 오는가
옥상의 비닐하우스에 씨앗을 심고 동호회 간판을 걸고 나서야, 세 사람은 호스로 서로에게 물을 뿌린다. 영화의 앞 삼십 분에는 없던 장면이다. 일본의 한 감상글은 이들의 일상이 범죄를 시작한 뒤에 가장 청춘 영화처럼 보인다고 썼고, 나는 그 문장 앞에서 오래 멈췄다. 이 영화가 보여 주는 명랑함은 대마 잎 아래에서만 자라는 것인가. 아니면 그 명랑함은 원래 거기 있었고, 그것을 찍을 명분을 영화가 범죄에서 빌려 온 것인가. 카메라는 세 사람에게 가까이 붙어 있다. 가까이 붙는다는 것은 지지한다는 뜻인가, 아니면 도망칠 곳이 없다는 뜻인가.
5. 왜 아이들은 자기 손으로 팔지 않는가
수확한 것을 파는 일은 옥상을 몰래 쓰던 두 소년에게 맡긴다. 남들에게 말할 수 없는 사이를 가진 두 사람이다. 셋은 그들의 비밀을 알고, 그들은 셋의 비밀을 안다. 미성년자가 직접 팔면 위험하다는 계산이 있었다고 영화는 설명한다. 영화는 이 커플을 조롱하지도 눈물로 감싸지도 않는다. 그냥 거기 있는 사람들로 둔다. 그 태도는 좋았다. 그런데 비밀을 담보로 사람을 쓰는 일은, 이 영화에서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하던 일과 얼마나 다른가. 그 계산은 아이들의 것인가, 각본의 것인가. 나는 아직 가르지 못했다.
6. 도쿄에서 무엇을 보았기에 돌아온 뒤 서로를 피하는가
돈이 모이고 셋은 도쿄에 간다. 거래는 잘 되지 않고, 돌아온 뒤 셋은 한동안 끝난 사이처럼 굴다가 다시 붙는다. 한 글은 이 대목을 헐겁다고 했다. 나도 처음에는 그렇게 느꼈다. 그런데 설명이 없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진술일 수도 있다. 마을을 나가는 연습을 해 본 사람들은 그곳에서 무엇을 보았는가. 자기들이 나가도 별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았는가, 셋이 함께는 나갈 수 없다는 것을 보았는가. 영화는 말하지 않고 나는 모른다. 다만 이 침묵이 게으름인지 선택인지, 그것을 가르는 기준이 나에게 있기나 한 것인지 되묻게 된다.
7. 당신은 자막을 믿는가, 소리를 믿는가
졸업식 날, 한 아이가 옥상의 비닐하우스에 불을 붙인다. 연기가 체육관으로 흘러들고, 그 아이는 옥상에서 뛰어내려 교문 밖으로 달린다. 영화가 끝나기 직전에 세 사람의 그 뒤 인생이 자막으로 적힌다. 좋은 내용이 아니다. 그 자막에 대고 한 사람이 웃으며 소리친다. 그럴 리가 있냐고. 한 일본 감상글은 뛰어내리는 장면이 연기에 취한 친구가 본 환각일 수 있다고 썼다. 그렇다면 내가 본 달리기는 누가 본 것인가. 자막은 누가 적은 것인가. 그 외침은 자막을 향한 것인가, 자막을 읽고 있던 나를 향한 것인가. 영화는 글자와 목소리를 같은 화면에 두고 끝난다. 둘 중 하나를 고르는 일을 당신에게 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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