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2025
마티 슈프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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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 한 알은 봐주고 금고는 못 봐주겠더라
런던 호텔 방에서 전화기 줄을 손가락에 감고 있는 장면부터 얘기할게. 마티라는 청년이 다른 층 여배우 방에 전화를 걸어. 방값도 못 낼 스위트룸에서 말이야. 상대는 끊으려고 하고, 이 청년은 「그래도 당신하고 계속 얘기하고 싶어요」 그러더니 셋을 세면 건너편 과일 그릇에 사과가 나타나게 해 주겠다고 해. 셋을 세. 빨간 사과가 그릇에 들어가. 나는 그 장면에서 이 청년을 미워하긴 글렀다 싶더라고.
1952년 뉴욕, 스물셋. 삼촌 구두 가게에서 구두를 팔면서 탁구로 세계 챔피언이 되겠다는 청년이야. 어머니랑 같이 살아. 영화는 이 사람이 한 해쯤 사는 걸 쫓아가는데, 그동안 한 짓을 세어 보면 손가락이 모자라. 탁구 치는 장면보다 돈 세는 장면이 더 많이 기억나는 영화였어. 나는 그중에 세 개만 놓고 얘기하려고.
첫째. 삼촌이 약속한 돈을 안 주니까 권총을 들고 가게 금고를 열어 700달러를 꺼내. 그 돈으로 런던을 가. 둘째. 런던에서 방값도 없이 리츠 호텔 스위트에 들어앉아서, 펜 회사 회장네 테이블 저녁값을 통째로 자기가 내. 그 회장 부인하고는 이미 눈이 맞은 다음이고. 셋째. 뉴욕에 두고 온 여자가 있어. 레이철이라고, 남편 있는 소꿉친구. 가게 뒷방에서 한 번 있었던 일로 애가 생겼는데, 여덟 달 동안 연락 한 통을 안 하다가 돌아와서는 제 애가 아니라고 해.
저 나이엔 그럴 수 있다, 싶은 게 둘째야. 방값도 없이 좋은 호텔에 들어앉는 거, 남의 테이블 저녁값 내는 거, 전화기 붙들고 사과 마술 부리는 거. 스물셋이 가진 게 그거밖에 없거든. 돈은 없고 시간은 남고, 자기가 세상에서 제일 잘하는 게 하나 있다고 믿으면 사람이 그렇게 돼. 그 저녁값에 회장이 기분 상한 건 당연한 거고, 그 돈이 어디서 났는지는 묻지 말자. 나도 그 나이에 월급 받기 전에 월급을 다 쓴 적이 있어. 사과 마술은, 글쎄, 그건 재주지. 재주 있는 사람이 재주 부리는 걸 나무랄 수는 없잖아.
그래도 저건 아니다, 싶은 게 첫째야. 금고. 삼촌이 돈을 안 준 건 삼촌 잘못이야. 그건 맞아. 그런데 권총을 꺼내 드는 순간 누구 잘못인지는 중요하지 않게 돼. 가게에서 같이 일하던 사람한테 그걸 들이댄 거거든. 그 사람은 그날 밤 집에 가서 어떤 얼굴로 밥을 먹었을까. 마티는 나중에 그 일로 붙잡혔다가 도망쳐. 젊어서 저지르는 일이 있고, 젊어서 저질러도 안 되는 일이 있어. 선이 어딘지 나도 정확히는 모르는데, 남한테 총구 보여 주는 건 선 바깥이야.
셋째는 뭐라고 하기가 어려워. 남편 있는 여자하고 그렇게 된 것부터가 잘한 일은 아닌데, 그건 둘이 같이 한 일이니까 혼자 탓할 수는 없고. 여덟 달 연락 없던 것도, 제 애가 아니라고 한 것도, 나는 그게 나쁜 짓이라기보다 겁이라고 봤어. 스물셋이 아버지라는 말을 들으면 도망부터 가. 그런데 이 청년은 도망을 비행기 타고 가. 런던으로, 농구단 순회공연 무대로, 볼링장으로. 볼링장에서는 택시 기사 친구 월리하고 내기 탁구를 쳐서 벌금 1,500달러를 모으고 있어. 그 돈이 세계선수권 출전 정지를 푸는 돈이거든. 그것도 모자라니까 회장 부인이 벌금에 보태라고 값나가는 목걸이를 건네줘. 삼촌 금고의 700달러, 여배우의 목걸이, 볼링장 내기 돈. 이 청년이 탁구 치겠다고 쥔 돈 중에 제 손으로 번 돈은 볼링장 것밖에 없더라고. 그러니까 이 청년한테 돈은 늘 어딘가로 가기 위한 돈이야. 집에 오기 위한 돈이었던 적은 한 번도 없어.
마지막에 집에 와. 도쿄에서 한 경기 이기고, 미군들 도움으로 비행기를 얻어 타고, 뉴욕 병원으로 가. 레이철은 벌써 애를 낳았어. 그 청년이 자기를 아버지라고 하고, 어머니하고는 말없이 눈만 맞추고, 신생아실 유리 너머로 애를 보고 울어. 그 눈물이 얼마짜리인지는 모르겠어. 700달러어치인지 1,500달러어치인지. 다만 두 시간 반 만에 처음으로 돈 계산이 안 들어간 장면이긴 하더라고.
그 청년한테 한마디 하라면 이거야. 그 사과, 어떻게 한 건지 나한테도 한 번 보여 줘. 그거 하나는 남 속이는 재주가 아니라 남 웃기는 재주였어. 나머지는, 나도 잘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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