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 2026
최애의 사원
작품 페이지에서 댓글 반응 보기 →
열두 해는 매몰 비용이었나
경제학에 매몰 비용이라는 말이 있다. 이미 치러서 돌려받을 수 없는 비용을 뜻한다. 이 말 하나를 들고 드라마 한 편을 봤다. 12년 동안 한 사람을 좋아한 여자가 그 사람의 회사에 들어가는 이야기다. 개념이 맞는 데와 안 맞는 데가 있었고, 안 맞는 데가 더 재미있었다.
매몰 비용이라는 말
풀어 쓰면 이렇다. 어떤 결정을 할 때는 앞으로 들어갈 돈과 앞으로 얻을 것만 비교해야 하고, 이미 써 버린 돈은 계산에서 빼야 한다. 이미 쓴 돈은 어느 쪽을 골라도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말은 쉬운데 사람은 잘 못 한다.
일상의 예 셋. 영화가 삼십 분 만에 재미없다고 판명 났는데 표값이 아까워 끝까지 앉아 있는 것. 뷔페에서 배가 찼는데 본전 생각에 접시를 한 번 더 채우는 것. 삼 년 배운 악기가 영 안 맞는데 그동안 낸 학원비가 아까워 그만두지 못하는 것. 셋 다 이미 나간 돈이 앞으로의 선택을 붙잡고 있다. 경제학은 이것을 비합리라고 부른다. 나는 이 말이 반은 맞고 반은 모자란다고 생각하는데, 그 얘기는 뒤에 한다.
열두 해와 사직서
「최애의 사원」은 tvN이 2026년 8월 3일부터 9월 8일까지 내보낸 12부작이다. 네이버웹툰 「우리 오빠는 아이돌」이 원작이다. 남다름(김혜준)은 아이돌 그룹 D.N.X의 이찬(차우민)을 12년 동안 좋아했다. 대기업 SE물산에 다니다가 이찬이 패션 디렉터로 있는 패션 플랫폼 아펠로에 지원해 붙는다. 어림잡아 12년이면 초등학교에 들어간 아이가 대학을 졸업할 시간이다. 그 시간을 한 사람에게 썼고, 그 시간 때문에 안정된 직장을 버렸다. 매몰 비용 이론으로 보면 교과서에 실릴 만한 사례다. 12년은 어느 회사에 가든 돌아오지 않는 시간인데, 그 시간이 회사를 골랐다.
1회는 그 선택의 값을 바로 치르게 한다. 다름은 합격 소식에 들떠 전 직장 복도를 뛰다가 투자 미팅을 하러 온 아펠로 대표 강하기(강훈)와 부딪혀 그의 셔츠에 얼굴 자국을 남기고, 입사 축하 자리에서 취한 채 그의 코피를 터뜨린다. 첫 출근 날 대표실에서 기다리던 사람은 이찬이 아니라 강하기였다. 이찬이 공동대표에서 물러나 디렉터가 된 것이다. 다름은 악수를 청하는 손을 저도 모르게 뿌리친다. 12년을 걸고 온 회사에서 처음 만난 사람이 12년과 아무 상관없는 사람이었다.
개념이 가장 잘 들어맞는 곳은 7회다. 이찬이 미국의 영화 작업에 합류하게 되어 다름에게 같이 가자고 한다. 현지에 차와 집이 다 마련된다고 한다. 12년을 투자한 사람에게 그 투자를 한꺼번에 회수할 기회가 온 셈이다. 매몰 비용에 붙들린 사람이라면 간다. 지금까지 쓴 12년이 아까워서라도 간다. 다름은 가지 않는다. 자기는 이찬을 이성이 아니라 아직도 우상으로 느끼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하고, 아펠로의 사원으로, 오빠의 팬으로 남고 싶다고 한다. 그 전에 강하기가 한 말이 있다. 어떤 선택이든 다름 씨다운 선택인지 생각해 보라고. 경제학 교과서라면 과거는 잊고 미래만 보라고 했을 텐데, 다름은 과거를 잊은 게 아니라 과거를 제자리에 두었다. 12년은 팬의 시간이지 연인의 시간이 아니라고. 비용을 지우지 않고 항목을 바꾼 것이다. 이쪽이 교과서보다 정확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8회의 한 장면도 적어 둔다. 열애설과 사생팬 루머로 회사 앞이 엉망이 되고 다름이 사직서를 낸 뒤, 다름은 자기 다이어리를 들여다본다. 힘든 날에도 기쁜 날에도 '대표님'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다. 그제야 자기가 강하기를 좋아한다는 걸 안다. 기억이 아니라 기록을 보고 결론을 낸 것이다. 데이터가 먼저 있고 해석이 뒤에 왔다. 그리고 집 앞에 찾아온 강하기에게 좋아하는 것 같다고 먼저 말한다. 강하기는 말 대신 입을 맞춘다.
그런데 마지막 회에서 개념이 어긋난다. 파리 파견을 다녀온 다름에게 강하기가 반지를 내밀며 옆에 있어 달라고 묻고 다름이 매일 그러겠다고 답하는 건 로맨스의 결말이니 그렇다 치자. 문제는 그다음이다. D.N.X가 9년 만에 무대에 서고, 그 컴백 프로젝트의 담당자가 다름이다. 멤버들이 다름이 기획한 굿즈를 걸고 무대에 오른다. 12년이 자격이 된 것이다. 매몰 비용은 정의상 돌아오지 않는 돈인데, 드라마는 그 돈을 이자까지 붙여 돌려줬다.
이걸 어떻게 봐야 하나. 하나는 드라마가 판타지라서 그렇다고 하는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다른 하나는 애초에 12년이 매몰 비용이 아니었다고 하는 것이다. 매몰 비용은 쓰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돈이다. 영화표는 영화가 끝나면 종이다. 그런데 12년 동안 한 그룹을 들여다본 사람에게는 그 그룹에 관한 지식이 남는다. 무대를 몇 번 봤는지, 어떤 굿즈가 팔리고 어떤 게 안 팔렸는지, 팬들이 뭘 원하는지. 그건 비용이 아니라 투자였다. 다만 투자였는지 비용이었는지는 끝나 봐야 안다. 회수되면 투자고 안 되면 매몰이다. 그러니 다름이 1회에서 대기업을 버릴 때 그게 합리적이었는지는 그때는 아무도 몰랐고, 12회가 돼서야 결정됐다. 내 풀이가 여기서 틀릴 수 있다. 결과를 보고 원인을 고쳐 쓰는 건 과학이 제일 싫어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주의 입장에서 12년은 지구가 태양을 열두 바퀴 돈 시간이다. 거기에 아무 의미가 없다. 그래도 사람은 그 열두 바퀴에 이름을 붙인다. 팬심이라고 부르고, 비용이라고 부르고, 나중에는 경력이라고 부른다. 이름을 바꿔 붙이는 동안 바퀴 수는 그대로다. 그래도 사람은 거기서 의미를 본다.
댓글
아직 댓글이 없어요. 첫 댓글을 남겨 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