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 2026

들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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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보는 사람

즉흥한모금· 2026. 10. 11.· 2,993자

나를 나라고 증명하는 일은 대개 내가 하지 않는다. 신분증이 하고, 지문이 하고, 나를 오래 본 사람들이 대신한다.

넷플릭스 시리즈 〈들쥐〉는 그 대리인들이 한꺼번에 등을 돌린 자리에서 시작한다. 김홍선이 연출하고 이재곤이 썼다. 2026년 8월 28일에 열 편이 한 번에 공개됐다. 사람의 손톱을 먹은 들쥐가 그 사람과 똑같은 모습으로 변해 그의 삶을 대신한다는 설화에서 출발했고, 같은 제목의 웹툰이 원작이다. 삼 년 동안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던 소설가 제문재가 어느 날 이름과 얼굴과 인생을 통째로 잃는다. 류준열이 빼앗긴 쪽과 빼앗은 쪽을 함께 맡았다.

우리는 억울한 사람의 사정이 언젠가는 밝혀진다고 믿는다. 어딘가에 원본 서류가 남아 있고, 누군가는 분명히 기억하고 있고, 차분히 설명하면 오해가 풀린다고 믿는다. 그 믿음 하나로 사람들은 창구 앞에 앉아 번호표를 쥔다. 이 작품은 그 자리에서 번호표를 빼앗는다. 밝혀지지 않는다. 서류는 이미 고쳐져 있고, 기억하는 사람들은 다른 얼굴을 기억하고 있다.

1화에서 문재의 휴대폰 지문 인식이 먹통이 된다. 사소한 고장처럼 보이는 장면이다. 그다음부터는 사소한 것이 하나도 없다. 집이 그의 집이 아니게 되고, 통장의 돈이 그의 돈이 아니게 되고,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지 못한다. 주민등록증도, 지문도, 동창들의 증언도 입을 모아 그를 가짜라고 가리킨다. 자기가 진짜라고 외쳐도 증거는 전부 반대편에 서 있다.

나는 이 장면에서 화가 나지 않았다. 그를 증명하던 것들이 처음부터 그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지문은 기관이 보관하고, 이름은 서류가 보관하고, 얼굴은 남들의 기억이 보관한다. 보관을 맡은 쪽이 손을 들면 맡긴 사람은 사라진다. 세상은 원래 그렇게 생겼다. 이 작품의 공포는 괴담이 아니라 행정에 있다.

들쥐 스틸컷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나를 증명한다. 출근 기록기에 손가락을 대고, 은행 앱에 얼굴을 비추고, 창구에 카드를 내민다. 그 절차는 나를 보호하려고 만들어졌다. 같은 절차가 반대 방향으로 돌아가는 순간, 나를 가장 빠르게 지우는 도구가 된다. 이 작품은 그 방향 전환을 괴물 없이 보여 준다. 괴물보다 서늘한 것은 정상 작동하는 시스템이다.

공황장애로 바깥에 나가지 못하던 사람이 바깥으로 떠밀린다는 설정도 그렇다. 집에 있으려고 삼 년을 버틴 사람에게서 집부터 가져간다. 작품은 그 역설을 길게 설명하지 않는다. 문이 열리고, 그는 나간다. 갈 데가 있어서가 아니라 남을 자리가 없어서 나간다.

그가 손을 잡는 상대는 십 년 동안 그를 쫓아다닌 사채업자다. 노자는 선의로 오지 않는다. 떼인 돈을 받으러 왔다가 받을 사람이 통째로 사라졌으니 같이 찾아 나설 뿐이다. 3화에서 두 사람은 들쥐를 잡을 덫을 함께 놓는다. 나는 이 동맹이 마음에 들었다. 둘 중 누구도 상대를 좋은 사람으로 착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쇠 방망이를 끌고 밤 시장 골목을 걸어 나오는 남자가 이 이야기에서 가장 정직한 축에 속한다.

들쥐 포스터

형사 순용은 반대쪽에 서 있다. 칸막이 책상에 앉아 봉투를 열고 서류를 들여다본다. 그 서류에는 문재가 가짜라고 적혀 있다. 그는 게으르지 않다. 오히려 성실하다. 성실한 사람이 성실하게 일할수록 한 사람이 더 빨리 지워진다. 이 작품이 악역을 한 명에게 몰아두지 않는 지점이 거기다.

중요한 건 그다음이다. 문재는 억울해하는 데 시간을 오래 쓰지 않는다. 세상을 향해 원망을 늘어놓지 않는다. 자기를 알아봐 달라고 사람들을 붙잡고 매달리지도 않는다. 불쌍하게 봐 달라는 표정을 짓지 않는다. 설명을 포기한 자리에서 그는 비로소 움직인다. 증명을 남에게 맡기지 않기로 한 사람의 얼굴이 거기서 처음 나온다.

빼앗은 쪽에도 사정이 있다. 그는 자기 이름으로 인정받지 못한 시간을 오래 살았다. 법적으로 연고가 없는 사람이 되어 남의 이름 안으로 들어갔다. 작품은 그 사정을 변명으로 쓰지 않는다. 사정이 있다고 해서 남의 인생을 가져가도 된다는 쪽으로 선을 넘지 않는다. 사정과 책임을 따로 두는 태도가 이 드라마에서 가장 어른스러운 부분이다.

이 작품은 넣을 수 있었던 장면 몇 개를 끝내 넣지 않았다.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진짜를 알아보고 미안해하는 장면이 없다. 잃어버린 삼 년을 보상해 주는 장면이 없다. 누군가 그의 손을 잡고 처음부터 너인 줄 알았다고 말해 주는 장면도 없다. 그런 장면은 거짓말이기 때문이다. 한 번 지워진 사람에게 세상이 사과하는 일은 드물다.

열 편은 길다. 쫓고 쫓기는 그림이 비슷한 모양으로 되풀이되는 구간이 중반에 있다. 거기서 긴장이 한 번 풀린다. 같은 얼굴 둘을 한 화면에 나란히 세우는 일을 이 작품은 아낀다. 목소리와 걸음과 숨의 차이로 둘을 갈라놓는다. 그 절제는 끝까지 간다.

후반에 구도가 뒤집힌다. 빼앗기기만 한 줄 알았던 문재에게도 지난 일이 있다. 대학 시절 동창의 습작을 제 것으로 삼아 작가가 됐고, 그 일의 끝에서 동창은 연인을 잃었다. 빼앗긴 자와 빼앗은 자가 한 사람 안에 함께 들어 있다. 피해자 자리에 앉아 있던 인물을 그 자리에서 끌어내리는 선택이다. 보기에 편한 이야기는 여기서 끝난다.

마지막은 제주로 가는 배 위다. 두 사람은 바다 위에서 엉키고, 문재는 상대를 물로 떨어뜨린다. 이름이 돌아온다. 그런데 돌아온 사람은 떠나기 전 사람이 아니다. 그는 자기 삶을 가져갔던 자의 방식 몇 가지를 그대로 따라 하기 시작한다. 끝내지 못한 원고가 남고, 죄책감이 남는다. 통쾌한 결말이 아니다. 허무하다는 말도 나왔다. 나는 그 허무함이 정직하다고 생각한다. 되찾은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 하나를 조용히 확인하고 끝나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에서 버틴다는 말은 가만히 앉아 견딘다는 뜻이 아니다. 증명을 포기하고 걸어 나가는 쪽에 가깝다. 억울함을 호소하는 데 쓸 힘을 다음 한 걸음에 쓰는 것이다. 그렇게 한다고 사람이 대단해지지도 않는다. 다만 사라지지 않는다. 가라앉지 않는 것.

자기를 설명하느라 지친 당신에게 한 가지만 적는다. 설명은 대개 통하지 않는다. 통하지 않아도 가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알아보는 사람이 없어도 오늘 한 일은 남는다. 남는 것으로 버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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