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 2026
포핸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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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핸즈는 무엇을 보여 주지 않기로 했는가
질문에서 시작하겠다. 포핸즈는 한 대의 피아노를 두 사람이 나눠 쓰는 방식의 이름이고 이 드라마는 열두 회 동안 그 방식에 관해 말하려 했다, 라고 적고 나니 이것은 질문이 아니라 요약이다. 다시 묻겠다. 이 드라마는 무엇을 보여 주기로 했고, 무엇을 보여 주지 않기로 했는가. 나는 두 번째 쪽에 오래 머물렀다.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보여 주지 않기로 한 것의 목록이 이 작품의 모양을 정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첫 번째 질문.
이 드라마는 무엇을 보여 주기로 했는가. 1회는 프라하 국제 콩쿠르 파이널의 밤에서 시작한다. 한쪽에는 손가락에 피를 흘리면서 연주를 멈추지 않는 강비오가 있고, 다른 쪽에는 괴한들에게 쫓기다 총에 맞고 물속으로 떨어지는 최정요가 있다. 그런 다음 화면은 6개월 전으로 돌아간다. 당신은 여기서 이 드라마가 아낄 줄 모르는 이야기라고 생각할 것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가장 아픈 두 장면을 첫머리에 다 꺼내 놓고 시작하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촛불을 세워 둔 강당에서 둘이 한 건반에 앉는 밤도, 학교 문이 닫힐 때까지 치다가 난간을 넘어 뛰어내리는 낮도, 이 드라마는 아끼지 않고 보여 준다.

두 번째 질문.
그렇다면 보여 주지 않기로 한 것은 무엇인가. 총에 맞은 어깨, 쓸 수 없게 된 오른손, 피아노에서 지휘대로 건너간 9년이다. 우리는 스물일곱의 최정요를 이미 완성된 지휘자로 만난다. 그사이에 무엇이 있었는지, 그가 몇 번이나 건반 앞에 앉았다가 일어섰는지, 화면은 말하지 않는다. 보여 주지 않기로 한 것이 아니라 보여 줄 수 없었던 것이다, 라고 쓰려다 지웠다. 아니, 다시 말하겠다. 이것은 생략이 아니라 교환이다.

교환이라고 쓴 이유는 이렇다. 최종회에서 강비오는 최정요의 주치의를 만나고, 그제야 알게 된다. 그가 9년 만에 다시 건반 앞에 앉을 수 있었던 것은 회복이 아니라 부작용을 감수한 주사였다는 것을. 중요한 것은 그 사실의 내용이 아니라 그 사실이 도착한 방식이다. 우리는 그것을 보지 못하고 듣는다. 말하자면 이 드라마는 한 사람이 자기 몸과 혼자 싸운 시간을 화면 밖에 두고, 그것을 뒤늦게 전해 받는 자리에 우리를 앉힌 것이다. 보는 자리와 듣는 자리를 바꾼다는 것. 그것이 여기서 일어난 일이다.
당신은 이것을 반칙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숨겨 두었다가 맨 뒤에 꺼내는 것은 오래된 수법이고, 수법은 감정을 만들어 내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나도 한동안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이 드라마가 끝내 보여 주지 않은 것이 상처가 아니라 상처를 혼자 견디는 시간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나는 그 선택을 예의라고 부르고 싶어진다. 어떤 시간은 찍히는 순간 구경거리가 된다. 보여 주지 않음으로써 남겨 둔 자리가 여기에 있고, 나는 이 자리바꿈을 지지한다.
세 번째 질문.
글을 여기서 끝내려 했다. 그런데 마지막 장면이 남는다. 3년 뒤 낯선 나라의 성당에서 두 사람은 다시 만나고, 화면은 그들의 웃는 얼굴을 보여 준다. 물속으로 떨어지던 몸과 성당에서 웃는 얼굴 사이에, 보여 주지 않은 시간이 통째로 들어 있다. 그래서 당신에게 묻는다. 당신이 본 것은 두 사람이 다시 만나는 장면인가, 아니면 그 9년이 끝내 설명되지 않은 채로 남았다는 사실인가. 나는 이 질문에 답하지 않고 넘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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