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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갚는 일과 돌려주는 일

조용한근육맨· 2026. 10. 09.· 2,379자

갚는 일과 돌려주는 일은 다르다. 갚는 것은 빚진 쪽이 자기 것을 덜어 내어 셈을 맞추는 일이고, 돌려주는 것은 처음부터 남의 것이던 무엇을 제자리에 놓는 일이다. 앞의 것은 끝이 있고 뒤의 것은 끝이 잘 보이지 않는다. 갚고 나면 두 사람의 관계는 정리되지만, 돌려주고 나면 관계는 그제야 다시 시작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속죄라고 말할 때 떠올리는 것은 대개 앞쪽이다. 그런데 어떤 이야기는 굳이 뒤쪽을 택한다.

나는 이 드라마가 그 어려운 쪽을 택했다고 생각하고, 왜 그렇게 보이는지를 말해 보려 한다. 이야기는 음악 천재들이 모인 예술고등학교에서 시작한다. 하루 열 시간을 연습하며 일등을 놓치지 않는 강비오가 있고, 재능을 버려두고 살다가 그의 연주를 보고 다시 피아노 앞에 앉은 최정요가 있고, 두 사람 사이에서 자기 자리를 지키는 비올라 전공 홍재인이 있다. 열일곱에 만난 세 사람이 스물일곱이 되기까지의 십 년을 열두 회에 담았다. 그 십 년의 한가운데에 최정요 납치 사건이 있고, 비오는 그 일로 비어 버린 자리에서 정요의 악보로 콩쿠르 우승자가 된다. 제목이 가리키는 포핸즈는 한 대의 피아노를 두 사람이 함께 치는 방식을 뜻한다.

포핸즈 스틸컷

질문은 이것이다. 마지막 회가 그린 것은 비오가 진 빚을 갚는 과정인가, 아니면 돌려주는 과정인가. 두 가지를 말할 수 있다.

첫째, 이 드라마는 갚는 일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먼저 끝까지 보여 준다. 비오는 만류를 뿌리치고 기자회견을 연다. 그는 구 년 전의 일을 모두 말하고, 남의 악보로 우승자의 자리에 앉았다고 밝히고, "제 욕심 때문에 벌어진 일이니까요"라고 말한 뒤 자기가 얻은 모든 것을 내려놓겠다고 선언한다. 여기까지는 우리가 아는 속죄의 꼴이다. 그런데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네 걸음을 더 간다.

포핸즈 포스터

회견장이 어지러워지는 사이 할아버지 강승운이 위독해진다. 그는 임종 자리에서 손자에게, 네가 평생 정요의 뒤를 쫓으며 괴로워할 줄 알았는데 너를 가둔 것은 바로 나였다고 말한다. 그러고는 손자가 치는 월광 소나타를 들으며 숨을 거둔다. 그 뒤 비오는 음악을 내려놓기로 하고 피아노를 처분한다. 갚기의 논리를 끝까지 밀고 가면 결국 자기를 지우는 데에 이른다는 것을, 이 대목은 조용히 보여 준다. 앞에서 갚는 일에는 끝이 있다고 썼는데,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정확하지도 않다. 갚기의 끝은 셈의 완결이 아니라 갚는 사람의 소멸이다.

둘째, 그래서 이 이야기에서 돌려주는 쪽은 비오가 아니라 정요다. 정요는 비오가 처분한 그 피아노를 낙원상가에서 도로 사 둔 뒤 그를 불러 세운다. 자기 몫을 받아 내는 대신, 상대가 버린 것을 사다가 상대 앞에 다시 놓는 것이다. 그는 비오가 자기의 빛이었다고 말하고, "우린 음악 안에 있어야 살아 숨 쉴 수 있는 놈들"이라고 말한다. 두 사람은 구 년 만에 한 건반 앞에 나란히 앉는다. 빼앗긴 사람이 빼앗은 사람에게 음악을 돌려주는 장면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물론 이것을 화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화해라는 말은 두 사람이 마주 서서 손을 맞잡는 그림을 떠올리게 하는데, 이 장면의 두 사람은 마주 보지 않는다. 그들은 같은 쪽을 보고 나란히 앉아 각자 두 손을 쓴다. 포핸즈라는 말이 끝내 사람의 관계를 가리키는 말이 되는 지점이 여기라고 나는 생각한다. 마주 보는 일보다 같은 것을 함께 보는 일이 어려운 까닭은, 그러려면 상대가 내 자리를 침범하지 않으리라고 믿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한 번 더 간다. 정요는 지휘자 자리를 내려놓고 편지만 남긴 채 사라지고, 비오는 그의 연주가 손이 굳어 가는 병을 주사로 눌러 가며 얻은 일시적인 것이었음을 뒤늦게 알게 된다. 그때 비오가 하는 일은 그를 찾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그가 작곡한 네메시스를 연주해 세상에 내놓는 것이다. 이 대목에 보상이나 해방 같은 흔한 이름을 붙이고 싶어지지만, 조금 다르게 말하고 싶다. 이것은 돌려주기다. 남의 이름으로 받았던 영광을 공개 석상에서 반납하는 일이 첫 번째 몸짓이었다면, 남의 음악을 그 사람의 것으로 세상에 놓아 주는 일은 두 번째 몸짓이다. 앞의 것은 자기에게서 덜어 내는 일이고 뒤의 것은 상대에게 더해 주는 일이어서, 둘은 방향이 다르다.

마지막에 비오는 엽서 한 장을 받고 낯선 나라의 성당을 찾아간다. 정요는 그곳에서 성가대와 함께 새 노래를 만들고 있다. 두 사람은 별다른 말을 주고받지 않고 웃기만 한다. 셈이 끝난 사이라면 그 자리에서 할 말이 있었을 것이다. 할 말이 없다는 것은 셈이 끝나지 않았다는 뜻이고, 돌려주는 일에는 끝이 없다는 뜻이다. 이 드라마가 내게 가르쳐 준 것은, 미안함을 자기를 지우는 방식으로 처리하려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용서가 아니라 자기 자리를 돌려받는 경험이라는 것이다. 갚는 일은 혼자서도 할 수 있지만 돌려주는 일에는 반드시 두 사람이 든다. 네 손이 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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