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2026
오디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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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한 사람은 왜 다시 떠나는가
현관에 신발을 어느 쪽으로 두는지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코를 안쪽으로 두는 사람이 있고 바깥으로 돌려 두는 사람이 있다. 나는 늘 바깥으로 돌려 둔다. 언제든 나갈 사람처럼 보이고 싶은 것이다. 물론 나는 거의 나가지 않는다.
그런 내게 172분짜리 귀향담이 왔다. 도착으로 끝날 줄 알았더니 출발로 끝나는 영화다. 트로이에서의 십 년이 끝나고도 그는 집에 닿지 못한다. 집에서는 다른 남자들이 그의 의자에 앉아 그의 아내에게 구혼하고 있다.
목마가 성문 안으로 들어간다. 배 속에 숨어 있던 병사들이 쏟아진다. 도시가 탄다. 그 뒤로 영화는 그를 바다에 풀어 놓는다. 동굴에서 외눈박이 거인을 만나고, 마녀의 집에서 부하들이 사람 아닌 것으로 변하고, 죽은 자들과 마주 선다. 거인과의 결투가 있고 이타카에서의 마지막 싸움이 있다. 그는 매번 살아남는다. 살아남는다는 것이 이 영화에서는 좋은 소식이 아니다.

동굴 안에서 그는 자기 이름을 묻는 괴물에게 이름을 대지 않는다. 대신 이렇게 말한다.
나는 아무도 아니다
이 한 줄로 그는 산다. 이름을 지워야 사는 장면이 영웅담 한가운데에 놓여 있다. 영웅은 이름을 남기려고 싸우는 사람이라고 배웠는데, 이 사람은 이름을 지워서 동굴을 빠져나온다. 남는 쪽과 사는 쪽 중에 그는 사는 쪽을 골랐다. 그러고 나서 평생 이름을 되찾으러 간다.

집에 돌아간다는 것은 이름을 되찾는다는 뜻이다. 이름을 되찾는다는 것은 자기가 한 일을 전부 함께 돌려받는다는 뜻이다. 속임수로 성을 무너뜨린 일, 데리고 간 사람들을 데리고 오지 못한 일, 바다 위에서 내린 모든 결정이 이름에 붙어서 같이 온다. 귀향은 상이 아니라 청구서다. 그는 마침내 그 청구서를 받는다.
기다린 쪽의 시간은 어떻게 되는가. 이 영화는 회상 안에 회상을 넣어 가며 떠난 사람의 여정과 아들의 이야기 사이를 오간다. 아내의 시간은 그 사이에 자리를 얻지 못한다. 떠난 사람에게는 겪은 일이 쌓이고 남은 사람에게는 같은 하루가 쌓인다는 듯이. 나는 이것이 설계인지 누락인지 끝내 정하지 못했다. 화면에 비치는 그 얼굴이 유난히 조용한 것은 그래서인지도 모른다.
이 영화는 전편을 아이맥스 필름 카메라로 찍은 첫 영화라고 한다. 신화를 가장 큰 화면에 올리려고 가장 무거운 장비를 들고 다녔다는 말이다. 가장 오래된 이야기에 가장 새로운 기계를 붙인 셈이다. 삼천 년 전 사람의 얼굴을 보려고 70밀리 필름을 돌린다는 것은 그 자체로 좀 우스우면서 조금 감탄스럽다.
그러나 큰 화면이 큰 이야기를 보증하지는 않는다. 172분을 견디고 나서 내게 남은 것은 거인도 마녀도 아니고 이름을 대지 않던 한 문장이었다. 요즘도 귀향이라는 말은 여기저기 쓰인다. 복직, 복귀, 원대복귀, 명예로운 귀환. 다들 돌아가는 일을 결승선처럼 말한다. 돌아간 다음에 무엇을 할지는 아무도 말해 주지 않는다.
마지막에 그는 왕좌를 아들에게 넘기고 아내와 함께 배에 오른다. 아들은 부두에서 배웅한다. 화면에 목마와 무너지는 건물이 지나가고, 청동기 시대가 그렇게 끝났다는 자막이 올라온다. 한 시대가 닫히는 자막 앞에서 나는 엉뚱하게 우리 집 현관을 떠올렸다. 코를 바깥으로 돌려 둔 신발은 결심이 아니라 습관이다. 떠나는 사람과 떠날 자세만 잡는 사람은 다르다. 나는 후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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