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2026
부활남: 더 레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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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종당하지 않는 사람을 당신은 뽑겠는가
질문에서 시작하겠다. 어떤 영화는 무엇을 보여 줄 것인가로 제 자리를 정하고, 어떤 영화는 무엇을 보여 주지 않을 것인가로 제 자리를 정한다. 부활남: 더 레드를 두고 내가 오래 붙들고 있는 것은 이 영화가 화면에 올린 것이 아니라 올리지 않기로 한 것이다. 다시 묻겠다. 백 분 남짓한 시간 동안 이 영화가 끝내 비워 둔 자리는 어디이며, 그 빈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첫 번째 질문.
이 영화는 죽음을 어디에 놓는가. 이야기는 서른한 살 취업 준비생 석환의 죽음에서 출발한다. 면접을 망치고 돌아온 밤에 낯선 이들이 그를 덮치고, 그는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는다. 그런데 죽음을 앞둔 그가 하는 말은 살려 달라가 아니다. 평생 뭐 해 놓은 것 하나 없이 이렇게 끝나는 줄 알았다는 말이다. 당신은 여기서 비명을 기다릴 것이다. 영화는 비명 대신 셈을 내민다. 무엇을 해 놓았고 무엇을 못 해 놓았는가, 라는 셈.
죽은 지 일흔두 시간이 지나면 그는 눈을 뜬다. 죽음이 사흘짜리 결근이 되는 순간 무서움은 갈 데가 없어진다. 그러니까 이 영화가 가장 먼저 보여 주지 않기로 한 것은 죽는 일의 무서움이다. 무서움을 뺀 자리에 들어앉은 것은 면접이다. 죽었다 살아난 사람의 머릿속에 다음 면접이 먼저 들어 있다. 나는 이것을 가볍다고 읽지 않는다. 무서움이 사라진 자리에 남는 것이 생계라면, 그 사람에게 더 무서운 쪽이 어느 쪽인지는 이미 정해진 것이다.
이 영화가 빠르다는 말은 거의 모든 평이 먼저 꺼내는 말이다. 백 분하고 조금, 그 시간 안에서 장면과 장면은 설명을 사이에 끼우지 않고 붙는다. 빠르다는 것은 속도의 문제가 아니라 태도의 문제다. 설명하지 않겠다는 선언인 것이다. 그러니 이 영화에서 생략은 사고가 아니라 방침이다. 사람이 죽고 사흘이 지나고 눈을 뜨는 동안, 영화는 그 사람이 없던 사흘에 대해 변명하지 않는다. 당신은 여기서 설명을 기다릴 것이다. 영화는 당신을 기다리게 두고 다음 장면으로 간다.
원작이 있다는 사실도 이 질문 안에 놓인다. 삼 년 가까이 연재된 이야기가 백 분으로 줄었다. 줄이는 일은 고르는 일이다. 고르면서 영화는 한 가지를 바꾸었다. 원작에서 특정한 종족의 것이던 능력이 여기서는 인체 실험의 결과가 된다. 타고난 것이 만들어진 것이 된 것이다. 태생이라면 물을 데가 없지만, 만들어진 것이라면 만든 쪽이 있다. 묻지 않아도 될 것을 물어야 할 것으로 바꾸어 놓은 셈이다.
그는 죽을수록 강해지고, 강해질수록 머리털이 붉어진다. 비밀을 가진 사람인데 그 비밀이 머리 위에 떠 있다. 배급사가 내놓은 포스터에는 그 붉은 머리와 긁힌 얼굴, 그리고 죽었는데요, 살아났습니다라는 한 줄이 놓여 있다. 변명이 아니라 보고다. 숨기는 사람의 얼굴이 아니라 들킨 사람의 얼굴인 것이다.

두 번째 질문.
왜 하필 그에게만 통하지 않는가. 그를 쫓는 블랙은 남의 마음을 조종하는 사람이다. 세우고 앉히고 걷게 한다. 그 힘이 석환에게만 듣지 않는다. 나는 처음에 이것을 이야기를 굴리기 위한 편의라고 적었다. 아니, 다시 말하겠다. 면접장을 옆에 놓는 순간 생각이 달라졌다. 석환이 떨어지는 까닭은 모자라서가 아니라, 면접장에서 불합리한 것을 보면 참지 못하고 화를 내기 때문이다. 조종당하지 않는 사람. 이 한 문장이 영화 안에서 두 번 쓰인다. 한 번은 무능의 이름으로, 한 번은 초능력의 이름으로.
조종이 모두에게 통하고 한 사람에게만 통하지 않는다면, 통하는 쪽이 이 세계의 기본값이다. 이 세계의 사람들은 남이 밀면 밀리는 대로 선다. 면접장이라는 자리도 그렇게 생겼다. 하고 싶은 말을 삼키는 법을 익힌 사람만 통과하는 자리, 삼키는 일이 곧 예의로 불리는 자리. 석환은 거기서 번번이 떨어진다. 떨어지고도 그만두지 않는다. 집에서는 동생 예린이 면접관 자리에 앉아 오빠에게 묻고 오빠가 답한다. 면접이 집 안까지 따라 들어와 있는 것이다. 영화는 그 모의 면접을 웃자고 놓지 않았다. 떨어진 사람이 혼자서는 연습조차 할 수 없다는 사실이 거기 있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같은 성질에 이름을 두 개 붙여 놓고 그 사이를 백 분 동안 오간다. 면접장에서 탈락 사유가 되는 것이 싸움터에서는 유일한 방어가 된다. 당신은 이것을 위로라고 부를 수도 있다. 나는 그렇게 부르지 않겠다. 위로라면 세상 쪽이 바뀌어야 하는데, 여기서 바뀌는 것은 사람의 몸뿐이기 때문이다.
조종하는 쪽은 설명하지 않는다. 블랙은 말을 아낀다. 배급사가 공개한 스틸 한 장에서 그는 밤의 도시를 등지고 서 있고, 뒤쪽 불빛은 번져 있다. 화면 앞쪽에 선 사람의 뒷머리는 흐리고, 초점은 그 어깨 너머에 선 그의 얼굴에 가 있다. 보는 쪽이 흐려지고 보이는 쪽이 또렷해지는 자리. 조종이란 결국 누가 초점을 쥐느냐의 문제다.

또 한 장의 스틸에서 그는 파란 체육복 차림으로 바닥에 엎드려 소파 뒤에 몸을 붙이고 있다. 고개만 돌려 뒤를 본다. 멀리 선 사람들은 흐리게 번져 있다. 숨은 사람이 화면 앞에 크게 있고 쫓는 사람이 뒤에 작게 있다. 숨었는데 다 보인다. 이 영화는 그 상태를 되풀이해서 찍는다. 붉은 머리를 한 채 길 위에 서 있는 사람, 가려지지 않는 사람.
이 감독의 전작을 떠올리는 것은 피할 수 없다. 2015년의 뷰티 인사이드는 날마다 다른 얼굴로 깨어나는 사람의 이야기였다. 얼굴이 계속 바뀌어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 그로부터 2023년의 독전2를 거쳐 이번에는 얼굴은 그대로인데 머리털에 표가 나는 사람을 찍었다. 알아볼 수 없음에서 숨을 수 없음으로. 나는 이 자리바꿈이 우연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묻던 쪽이 뒤에 가서 직접 몸을 쓴다는 것도 적어 두어야 한다. 집에서 질문지를 들고 있던 동생은 후반부에 자기 몫의 싸움을 한다. 묻는 자리에서 나와 맞는 자리로 간 것이다. 이 영화에서 사람이 자라는 방식은 대답을 잘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질문하는 자리를 떠나는 것이다. 나는 그 자리바꿈을 뒤늦게 알아보았다.
마지막 대목은 쓰지 않으려 했다. 끝에서 석환은 도망을 그만둔다. 동생 예린과 친구 영하가 위험해지자 돌아서서 맞선다. 첫 장면에서 그는 해 놓은 것이 하나도 없다고 말했다. 마지막에 그는 지켜야 할 것이 있는 사람이 되어 있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과 지킬 것이 있는 사람 사이, 그 사이를 메운 것이 죽음의 되풀이였다. 이 영화가 치른 값이 그것이다.
쿠키 영상은 없다. 불이 켜지기 전에 노래 한 곡이 흐르고 그것으로 끝난다. 더 보여 주겠다고 손을 내밀지 않는 끝맺음이다. 나는 이 끝맺음을 지지한다.
마지막 질문은 당신에게 넘기겠다. 조종당하지 않는 사람을 당신의 자리에서는 무엇이라고 부르는가. 면접장의 책상 이쪽에 앉은 쪽이 당신이라면, 그 사람을 뽑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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