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2006
시간을 달리는 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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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돌린 시간은 누구에게서 꺼내 온 것인가
나는 보낸 메시지를 지우는 기능을 자주 쓴다. 보내고, 다시 읽고, 지운다. 오타를 지우고, 너무 빨리 보낸 답을 지우고, 보내 놓고 보니 안 보내도 됐을 말을 지운다. 지우면 없던 일이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상대의 화면에는 메시지가 삭제되었다는 한 줄이 남는다. 없던 일이 되는 것이 아니라, 지웠다는 일이 하나 더 생기는 것이다. 되돌리기는 공짜가 아니었다. 나는 그것을 꽤 늦게 알았다.
그런 내게 이 영화는 되돌리기의 청구서를 보여 주는 영화다. 되돌리기로 시작해 보내 주기로 끝나는 영화다. 열일곱 살 마코토는 어느 날 과학실 칠판에서 글귀 하나를 본다. 시간은 아무도 기다려 주지 않는다. 그러고는 바닥에 떨어진 호두 같은 물건 위로 넘어지고, 그날 건널목에서 브레이크가 듣지 않는 자전거를 탄 채 기차 앞으로 떨어진다. 죽지 않는다. 대신 몇 분 전에 있다. 박물관에서 오래된 그림을 복원하는 이모는 그것을 타임 리프라고 부르고, 네 또래 여자애들한테 흔히 있는 일이라고 한다. 마코토에게는 같이 야구를 하고 노는 친구 둘이 있다. 치아키와 고스케다. 이 셋의 여름이 이 영화의 전부다.

능력을 얻은 소녀가 하는 일의 목록은 이렇다. 지각을 없앤다. 쪽지 시험의 오답을 없앤다. 노래방 시간을 몇 번이고 다시 산다. 동생이 먼저 먹어 버린 푸딩을 먹으러 돌아간다. 그리고 친구 치아키가 느닷없이 사귀자고 하자, 그 말이 나오기 전으로 돌아가 고백 자체를 없앤다. 세계를 구하는 데 쓰는 사람은 없다. 푸딩은 되찾는다. 나는 이 목록이 정직하다고 생각했다. 내게 그런 능력이 생겨도 첫 사용처는 푸딩 쪽일 것이다. 되돌리기를 하는 방법도 거창하지 않다. 달려가서 뛰어오른다. 그게 전부다. 시간을 거스르는 일이 체력 문제라는 것을 이 영화는 숨기지 않는다.

그러다 팔에 숫자가 보인다. 팔 뒤쪽에 문신처럼 찍힌 숫자. 자기 눈으로 보려면 팔을 돌려야 하는 자리다. 한 번 쓸 때마다 하나씩 줄어드는 숫자다. 그녀는 그때까지 횟수가 있다는 것을 몰랐다. 모르고 썼다는 것이 중요하다. 영수증 없이 쓰던 카드에 한도가 있었던 셈이다. 나는 이 숫자를 오래 생각했다. 숫자가 있다는 것은 무한하지 않다는 뜻이고, 무한하지 않다는 것은 선택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영화는 숫자가 줄어드는 것보다 더 불편한 것을 보여 준다. 마코토가 피한 일들이 사라지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간다는 것이다. 그녀가 되돌려 피한 일들의 뒷감당은 반에서 괴롭힘을 당하던 아이에게 가고, 그 아이는 소화기를 던진다. 고백을 없앴더니 치아키는 다른 친구와 사귀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녀의 그 자전거, 브레이크가 듣지 않는 그 자전거를 고스케와 후배가 빌려 타고 건널목으로 간다.
되돌린다는 것은 내가 겪을 일을 남에게 넘긴다는 뜻이다. 넘긴다는 것은 그 사람이 영문도 모른 채 받는다는 뜻이다. 영문을 모른다는 것은 항의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니 팔의 숫자는 마코토의 잔여 횟수가 아니라, 그녀가 남에게 떠넘길 수 있는 사고의 잔여 횟수였는지 모른다. 이 영화는 시간을 아끼라는 영화가 아니다. 시간이 혼자 쓰는 것이 아니라는 영화다. 내 오후를 되감으면 누군가의 오후가 같이 되감긴다. 그 사람은 동의한 적이 없다. 자전거를 빌려 간 사람은 빌린 것이 자전거인 줄 알았을 것이다. 실은 사고를 빌린 것이다.
덧붙일 것이 하나 있다. 과학실 바닥의 그 호두는 마코토의 것이 아니었다. 치아키가 미래에서 가져온 것이다. 그러니 그녀의 능력은 애초에 남이 흘린 것을 주운 것이다. 주운 것으로 되돌리고, 되돌린 것을 남에게 넘겼다. 이 영화에는 악당이 없다. 벌을 주는 사람도 없다. 있는 것은 주운 사람과 흘린 사람, 그리고 영문도 모르고 자전거를 빌린 사람뿐이다.
그러나 치아키가 있다. 그는 미래에서 왔다. 온 이유는 그림 한 점을 보기 위해서다. 이모가 박물관에서 복원하고 있는 그 그림, 수백 년 전 큰 전쟁과 기근이 이어지던 시대에 그려졌다는 그 그림이 그의 시대에는 이미 불타 없다. 그는 돌아갈 표를 한 장 남겨 두고 있었다. 그런데 건널목으로 가는 고스케와 후배를 구하려고 그 마지막 한 번을 쓴다. 그러고는 시간을 멈춰 놓고 마코토에게 자기가 어디서 왔는지 말한다. 되돌리기가 늘 남의 것을 꺼내 오는 일은 아니었다. 자기 것을 꺼내 남에게 주는 일일 수도 있었다. 내 해석은 여기서 한 번 흔들린다. 같은 능력이 사람에 따라 청구서가 되기도 하고 선물이 되기도 한다면, 문제는 시간이 아니라 그걸 쥔 손이다.
그림 이야기를 조금 더 해야겠다. 이모는 그 그림을 두고 오래 보고 있으면 이상하게 마음이 차분해진다고 말한다. 누가 그렸는지도, 값이 얼마나 나가는지도 아직 모르는 그림이다. 전쟁과 기근의 시대에 누군가는 그림을 그렸고, 그림은 몇백 년을 건너왔고, 미래의 누군가는 그것을 보려고 시간을 건너왔다. 되돌리는 능력이 아니라 남기는 능력이 사람을 건너게 한 셈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멀리 여행한 것은 마코토도 치아키도 아니다. 그림이다.
우리는 되돌리기 버튼을 많이 가진 시대에 산다. 문서의 실행 취소, 메시지 삭제, 구독 해지, 환불, 탈퇴, 차단. 어느 것도 남은 횟수를 팔에 찍어 주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되돌린 것이 어디로 갔는지 모른 채 산다. 어딘가의 상담원에게, 어딘가의 배송 기사에게, 어딘가의 화면에 남은 한 줄에게 갔을 것이다. 환불은 받았는데 누군가의 하루는 환불되지 않았을 것이다. 숫자가 찍힌다면 덜 누를까. 더 누를까. 나는 모르겠다. 횟수가 보이면 아껴 쓸 것 같지만, 횟수가 보이면 끝까지 쓰고 싶어지는 것도 사람이다. 다만 마코토는 숫자를 보고 나서야 자기가 무엇을 누르고 있었는지 알았다.
치아키가 사라진 뒤 마코토의 팔에 한 번이 더 남는다. 그녀는 그것을 푸딩에 쓰지 않는다. 고백을 없애는 데도 쓰지 않는다. 치아키에게 가서, 그 그림을 지키겠다고 말하는 데 쓴다.
그 그림은 미래에 가서 봐. 없어지지도 불타지도 않을 거야.
보낸 것을 지우는 대신 남길 것을 정하는 쪽으로 마지막 한 번을 쓴 것이다. 나는 여전히 메시지를 지운다. 다만 지우기 전에 상대의 화면에 남을 한 줄을 한 번 생각한다. 삭제된 메시지입니다. 그것도 메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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