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2006
시간을 달리는 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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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달리는 소녀
열일곱 살 콘노 마코토는 과학준비실 바닥에 떨어진 호두 모양 물건 위로 넘어집니다. 그날 건널목에서 브레이크가 듣지 않는 자전거째 기차 앞으로 떨어지죠. 죽지 않습니다. 몇 분 전으로 돌아가 있어요. 박물관에서 옛 그림을 복원하는 이모 요시야마 가즈코는 그걸 타임 리프라고 부릅니다. 네 또래 여자애들한테 흔히 있는 일이라고도 하고요. 마코토에게는 방과 후에 같이 야구를 하는 친구가 둘 있습니다. 마미야 치아키와 쓰다 고스케죠. 이 셋의 한 계절이 영화의 전부입니다.
원작은 쓰쓰이 야스타카가 1965년부터 이듬해까지 연재한 소설입니다. 1983년에 오바야시 노부히코가 실사로 만들었고, 그 뒤로도 여러 번 다시 만들어졌죠. 2006년의 이 애니메이션은 그중 리메이크가 아닌 쪽입니다. 원작에서 20년쯤 뒤를 배경으로 삼고, 원작의 주인공 요시야마 가즈코를 주인공의 이모로 데려다 놓았거든요. 그림을 고치는 그 이모가 그 사람입니다. 원작자는 이걸 정통 속편으로 인정했다더군요. 감독은 호소다 마모루고, 디지몬 극장판을 만들던 그가 회사를 나와 프리랜서로 만든 첫 장편입니다. 제작은 매드하우스, 각본은 오쿠데라 사토코, 캐릭터 디자인은 사다모토 요시유키예요. 98분입니다.

시간을 되돌리는 설정은 대개 두 가지 길로 빠집니다. 하나는 같은 하루를 반복하며 완벽한 하루를 조립하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사소한 변경이 커다란 파국을 부르는 길이죠. 앞쪽은 코미디가 되고 뒤쪽은 스릴러가 됩니다. 이 영화는 둘 다 조금씩 쓰되 어느 쪽으로도 끝까지 가지 않아요. 대신 규칙 하나를 못 박습니다. 팔에 숫자가 찍혀 있고, 한 번 쓸 때마다 하나씩 줄어든다는 것. 주인공이 그 숫자를 한참 뒤에야 본다는 점이 이 규칙의 핵심이고요. 흔한 설정에 계량기를 단 셈입니다. 계량기가 달리면 이야기는 저절로 끝을 향합니다.
이 소재로 할 수 있는 일은 많습니다. 미래가 어떤 곳인지, 시간을 건너는 기술이 무엇인지, 역사가 바뀌면 무슨 일이 나는지. SF가 늘 하던 일이죠. 영화는 그 대부분을 하지 않습니다. 미래에서 온 소년이 자기 시대를 말하는 대사는 두어 줄이에요. 땅 위로 강이 흐르는 걸 처음 봤다, 자전거를 처음 탔다. 그게 다입니다. 대신 넣은 것은 노래방, 조리실습, 쪽지시험, 강변의 야구예요. 시간 여행 영화가 시간 여행에 쓰는 분량이 이렇게 적은 경우는 드뭅니다. 그 자리를 방과 후가 채우고요. 소년이 보러 온 것도 미래의 비밀이 아니라 그림 한 점입니다. 자기 시대에는 불타 없어진, 이모가 복원 중인 그 그림이요. 그런데 복원 중이라 박물관에 걸려 있지도 않습니다. 보러 온 사람이 못 보고 노는 영화예요.
이모 이야기를 조금 더 해야겠습니다. 원작의 주인공이 20년 뒤에 하는 일이 남이 그린 그림을 남이 그린 대로 돌려놓는 일이라는 건 꽤 정확한 배치예요. 그 이모가 조카에게 하는 조언이 재미있습니다. 마코토가 되돌리기로 고백을 지웠다고 하자 고백한 사람의 성의를 없던 것으로 만들었다고 한마디 하고요. 나중에 둘 중 누구를 만나야 하느냐고 묻자 일단 만나 보고 아니면 다시 돌리라고 합니다. 조카가 사람 마음 갖고 노는 거 아니냐고 되묻죠. 되돌려 본 사람이 되돌리라고 권하고, 처음 되돌려 본 사람이 그걸 말립니다. 영화에서 어른이 하는 조언 중 가장 어른답지 않은 조언인데, 그래서 믿어집니다.

통하는 건 달리기입니다. 되돌리기가 체력 문제라는 걸 영화는 처음부터 숨기지 않아요. 달려가서 뛰어오르면 됩니다. 그러니 끝에 가서 마코토가 건널목을 향해 달리는 1분 남짓이 이 영화의 가장 큰 장면이 됩니다. 음악도 효과음도 없고 숨소리만 들려요. 카메라가 먼저 가고 주인공이 뒤처져 화면 밖으로 빠졌다가, 어느 순간 화면을 따라잡고 앞질러 나갑니다. 설명이 한 줄도 없는데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다 보이죠. 애니메이션이 달리는 사람을 그리는 방식으로는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그림이 예쁜 영화는 많지만 숨소리를 믿는 영화는 드물어요.
걸리는 건 조리실습입니다. 마코토가 튀김 기름 화재를 되돌려 피하자 그 사고는 같은 반 다카세 소지로에게 갑니다. 그 아이는 그 일로 괴롭힘을 당하다가 나중에 소화기를 들고 복수를 하죠. 되돌리기의 뒷감당이 남에게 간다는 걸 보여 주려고 넣은 인물인데, 그 일 말고는 하는 게 없어요. 이름과 대사와 소화기가 있을 뿐입니다. 주제를 설명하는 장치로는 효율적인데 사람으로는 좀 얇아요. 문제는 이 영화가 다른 데서는 그런 얇음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다른 인물들은 하나같이 맡은 일 말고 다른 것도 하거든요. 여동생조차 푸딩을 먹습니다.
또 하나. 규칙이 끝에서 한 번 움직입니다. 소년이 마지막 한 번을 친구들을 구하는 데 쓰면서 마코토의 한 번이 돌아오죠. 되돌린 시간이 그녀의 사용 기록까지 되돌린 셈입니다. 논리는 섭니다. 다만 그 한 번이 결말을 만드는 데 꼭 필요한 한 번이라 편리하긴 해요. 계량기를 달아 놓은 영화가 마지막에 계량기를 손으로 한 칸 돌린 건 맞습니다. 보신 분들은 대개 넘어가셨을 겁니다. 넘어갈 만한 자리이긴 해요.
목소리 이야기. 마코토는 나카 리이사입니다. 이 인물은 능력을 얻고도 목소리가 높아지지 않아요. 노래방에서 몇 시간씩 노래를 부르는 톤과 건널목으로 달리는 톤이 같은 사람의 것이라는 게 중요합니다. 치아키는 이시다 다쿠야, 고스케는 이타쿠라 미쓰타카고요. 셋이 야구장에서 주고받는 말은 대부분 아무 내용이 없는데, 그 아무 내용 없음이 뒤에 가서 값을 합니다. 나카 리이사는 2010년 실사판에서는 이모 가즈코의 딸을 연기했다더군요. 같은 집안을 두 번 산 셈입니다.
인물 구성을 세어 보죠. 가운데 셋. 그 바깥에 이름과 대사가 있는 사람이 이모, 여동생, 친구 유리, 후배 카호, 다카세, 다섯입니다. 그중 둘은 고백과 짝사랑을 나르는 역할이에요. 유리는 치아키를 좋아하고, 카호는 고스케를 좋아합니다. 마코토가 되돌리기로 치아키의 고백을 지우자 유리가 그 자리로 들어가고, 카호의 고민 상담을 받은 마코토는 고스케와 카호를 이어 주려고 몇 번이나 되돌리죠. 주변 다섯 중 셋이 주인공의 되돌리기 때문에 자리가 바뀌는 사람들입니다. 어른은 이모 하나고, 그 어른은 조언을 하고 다시 그림 앞에 앉습니다.
마지막은 소년이 시간을 멈추는 장면입니다. 건널목 사고를 되돌린 뒤 모든 게 멈추고, 고장 난 자전거를 끌고 온 소년이 자기가 미래에서 왔다고 말하죠. 시간 여행의 설명이 영화에서 가장 조용한 장면에 들어 있습니다. 설정 설명을 가장 시끄러운 자리에 두는 영화가 많은 걸 생각하면 드문 선택이에요. 그러고는 미래에서 기다리겠다는 말과 금방 가겠다는 대답이 오갑니다. 몇백 년 떨어진 사람들끼리 할 약속은 아닌데, 열일곱 살이 할 약속으로는 맞아요. 통하긴 합니다. 그 정도면 됐죠.
(덧) 국내에서는 2007년 개봉 뒤 2016년, 2023년, 2024년에 다시 걸렸고, 올해 9월에 4K와 4DX로 또 걸렸습니다. 네 번째 재개봉이에요. 4DX로 건널목 장면을 보신 분이 있다면 의자가 뭘 했는지는 좀 궁금합니다.
(덧) 올해 포스터의 톱니바퀴는 프랑스 회사가 만들었다더군요. 톱니바퀴가 타임 리프를 뜻한다고 보도자료에 적혀 있었습니다. 그렇겠죠.
(덧) 배경은 도쿄 나카노구 일대입니다. 건널목은 나카이역, 야구를 하는 공원은 철학당 공원이라더군요. 철학당이라는 이름의 공원에서 야구를 하는 영화입니다. 철학은 안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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