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2006

시간을 달리는 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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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딩 먹으러 돌아가더라고

무뚝뚝· 2026. 10. 12.· 2,968자

시간을 되돌리는 이야기라고 하면 일단 의심부터 해요. 되돌려서 뭘 하겠어요. 죽은 사람 살리고, 못 한 고백 하고, 그러다 울고. 그 틀을 벗어나는 걸 잘 못 봤거든. 이게 이십 년 전 일본 만화 영화고, 한 시간 반 조금 넘는 길이예요. 명작이라고들 하길래 그 말도 좀 의심했어요. 그런 말이 붙은 것치고 보고 나서 남는 게 없는 경우가 많잖아. 만화 영화라서 더 의심했어요. 그림이 예쁘면 이야기가 얇아도 넘어가 주게 되거든.

그런데 이 영화는 그걸 안 하더라고. 열일곱 살 여자애가 과학실에서 넘어졌다가 시간을 되돌리는 재주가 생겨요. 처음에 그걸 어디다 쓰느냐면, 지각 안 하는 데 써요. 쪽지 시험에 써요. 노래방에서 몇 시간이고 더 노는 데 쓰고, 동생이 먼저 먹어 버린 푸딩을 자기가 먹으려고 돌아가요. 친구가 사귀자고 하니까 그 말 듣기 전으로 돌아가서 없던 일로 만들고. 그게 다예요. 세상을 구하지도 않고 누굴 살리지도 않아요. 주인공을 근사하게 만들려고 애를 안 쓴 거지. 나는 그게 제일 좋았어요.

시간을 달리는 소녀 스틸컷

이 애한테 이모가 하나 있어요. 박물관에서 오래된 그림 고치는 일을 하는 사람이에요. 복원이라고 하죠. 남이 그린 걸 남이 그린 대로 돌려놓는 일이에요. 거기다 자기 솜씨를 넣으면 안 되는 일이지. 누가 그렸는지도 모르고 값이 얼마나 나가는지도 아직 모르는 그림이래요. 그래도 고쳐요. 일이니까. 그 그림이 몇백 년 전에 전쟁하고 기근이 이어지던 때 그려진 거래요. 그 험한 때 누가 그림을 그렸겠어요. 그런데 그렸더라고. 그걸 또 몇백 년 뒤에 누가 앉아서 고치고 있고. 그 이모가 조카한테 그러더라고. 시간이 돌아간 게 아니라 네가 돌아간 거라고. 설명을 길게 안 해요. 그러고는 다시 그림 앞에 앉아요. 일은 일이니까. 조카가 시간을 되돌리든 말든 그 사람은 매일 그 그림을 고쳐요. 나는 이 영화에서 제일 어른이 그 이모라고 봐요. 대단한 말을 해서가 아니라, 자기 일을 하고 있어서.

칠판에 영어로 한 줄 적혀 있어요. 시간은 아무도 기다려 주지 않는다. 영화에서 제일 유명한 말이래요. 틀린 말은 아닌데, 아무 말도 아니잖아. 시간이 사람을 기다려 주는 걸 본 사람이 있어요. 그 애가 처음에 기차에 치일 뻔한 것도 시간이 안 기다려 줘서가 아니라 자전거 브레이크가 안 들어서예요. 좋은 말 적어 놓을 시간에 자전거를 고쳤으면 됐지. 그런데 그 브레이크 안 듣는 자전거를 나중에 친구가 빌려 타고 건널목으로 가요. 좋은 말은 사람을 못 구하는데 고장 난 자전거는 사람을 잡더라고.

그 미래에서 온 애가 여기서 뭘 했느냐면, 야구를 했어요. 방과 후에 셋이서 공 던지고 받고, 노래방 가고, 자전거 타고. 그림 보러 왔다는 애가 그림은 못 보고 놀았어요. 그림이 복원 중이라 박물관에 걸려 있지도 않았거든. 돌아가야 하는데 어느새 여름이 됐다고 그러더라고. 일하러 온 사람이 일은 못 하고 놀다 간 거지. 나는 그게 밉지가 않았어요. 그 나이에 여름 하나 놀다 가는 게 뭐가 어때요. 사람이 그래요.

사귀자고 한 그 친구가 알고 보니 미래에서 온 애예요. 이모가 고치는 그 그림이 자기 시대에는 타서 없어졌대요. 그거 보러 왔대요. 그러고는 돌아갈 마지막 한 번을 그 애 친구들 구하는 데 써 버려요. 그 뒤에 강변에서 자전거 태워 주면서 그러더라고. 너희랑 있는 게 너무 즐거웠다고. 미래에서 온 사람이 하는 말치고 참 작은 말이에요. 세상이 어떻게 된다, 역사가 어떻게 된다, 그런 말이 아니고 그냥 즐거웠다고. 나는 그 작은 게 믿어졌어요.

시간을 달리는 소녀 포스터

그 애 얼굴 얘기를 하자면, 이 영화는 그 애를 불쌍하게 안 그려요. 시간을 되돌리는 게 서러워서가 아니거든요. 귀찮아서지. 서러운 거하고 귀찮은 거는 얼굴부터 달라요. 지각하는 게 귀찮고, 시험 틀리는 게 귀찮고, 친구가 갑자기 사귀자는 게 귀찮고. 열일곱 살한테 귀찮은 게 얼마나 많아요. 그걸 서럽다고 안 하고 귀찮다고 그린 게 이 영화가 잘한 거예요. 그리고 그 애는 울 시간에 뛰어요. 되돌리려면 달려서 뛰어올라야 하거든. 참 잘 그렸더라고요. 능력이 생긴 걸 이모한테 말하러 갈 때도 심각하지가 않아요. 이모도 심각하지가 않고. 네 또래 여자애들한테 흔히 있는 일이라고 하고 말아요. 나는 거기서 한 번 웃었어요. 흔히 있는 일이면 나한테는 왜 안 있었나 싶어서.

마지막에 둘이 헤어져요. 미래에서 온 애는 미래로 가야 하고, 그 애는 여기 남고. 미래에서 기다릴게, 그러니까 그 애가 응, 금방 갈게, 달려갈게, 그래요. 헤어지기 직전에 그 애가 유카타 입은 모습 보고 싶지 않냐고 붙잡기도 해요. 그 와중에. 나는 여기서 좀 웃었어요. 금방이 어디예요. 그 사람이 사는 데가 몇백 년 뒤인지도 모르는데. 그런데 사람이 그래요. 못 지킬 약속을 제일 씩씩하게 해요. 그러고는 그 그림을 자기가 지키겠다고 해요. 타지 않게, 없어지지 않게. 이모가 하는 일을 자기가 이어서 하겠다는 거지. 그게 이 애가 처음으로 자기 말고 남을 위해 쓴 한 번이에요.

그 애가 한 번밖에 안 남은 걸 남 보내는 데 쓴 게 억울하냐 하면, 글쎄. 푸딩에 쓴 것보다는 낫지. 그리고 그 애는 억울해하지도 않아요. 돌려보내고 나서도 억울하다는 말은 안 해요. 그걸 보면서 나는 그 이모 생각이 났어요. 남이 그린 걸 남이 그린 대로 돌려놓고 자기 이름은 안 남기는 사람. 조카가 결국 그 일을 배운 거예요.

젊은 사람들은 이 영화를 몇 번씩 본다더라고요. 이십 년 동안 극장에 몇 번을 다시 걸었대요. 왜 자꾸 보느냐고 물으면 잘 모르겠다고들 하는데, 나는 조금 알 것 같아요. 푸딩 때문이에요. 세상에 둘도 없는 재주를 얻은 애가 그걸 거창한 데 안 쓰고 푸딩에 쓰는 걸 보면 마음이 놓이거든. 나라도 그랬을 거라서.

배울 거 없어요. 그 애처럼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 애보다 시간을 잘 쓰는 것도 아니잖아. 그냥 열일곱 살짜리가 푸딩 먹으러 돌아갔다가 나중에는 그림 지키겠다고 하더라, 그게 다예요. 그 사이에 뭐가 있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요. 나도 한 번 더 볼지는 모르겠어요. 여름 하나가 있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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