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2003
올드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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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만두를 데우다 말았다
빨래를 개면서 틀었다. 2003년 영화고 두 시간이다. 2013년에 감독이 직접 화질을 손봐서 재개봉했다는데 우리 집 텔레비전에서는 그게 그거다(자백하자면 화질 차이를 알아본 적이 평생 없다). 구간별로 적는다.
처음 15분
1988년, 술 취한 오대수가 경찰서에서 소동을 피운다. 딸 생일 선물로 산 천사 날개를 들고 공중전화 부스에서 딸과 통화하다가, 보라색 우산 뒤로 사라진다. 자기 이름이 오늘만 대충 수습하며 살자는 뜻이라고 이죽거리던 사람이 그 길로 없어진다. 술주정 장면이 생각보다 길어서, 이 사람 밉상이네 하고 있다가 당했다. 양말 한 짝을 못 찾은 채로 화면만 봤다.
감금 15년
방 하나, 텔레비전 하나, 군만두. 아내가 죽었다는 소식을 텔레비전으로 보고, 용의자가 자기라는 것도 거기서 안다. 벽에 걸린 그림 밑에는 웃어라, 온 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 울어라, 너 혼자만 울게 될 것이다, 라는 문구가 붙어 있다. 다리가 무너졌다는 뉴스가 나오던 날부터 자기가 저지른 나쁜 짓을 적기 시작하고, 쇠젓가락으로 벽을 판다. 냉동실에 군만두가 있나 확인하러 갔다(있었다. 꺼내 놓고 데우다 말았다).
풀려나서
풀이 무성한 옥상에서 깨어난다. 뛰어내리려던 남자의 넥타이를 잡고 내 얘기부터 들으라고 한다. 지나가던 사람에게 받은 휴대전화로 첫 통화가 걸려 오고, 누구냐고 묻는 그 유명한 장면이 여기다. 일식집에서 산낙지를 통째로 먹고 쓰러지고, 요리사 미도의 집에서 깨어난다. 요즘 OTT 복수극이라면 여기까지가 1화 엔딩이고, 2화 예고에 복도가 나올 것이다.
군만두 순례
감금방에서 만두를 먹다 입에 걸린 전표 조각에 청룡이라는 글자가 있었다. 그래서 청룡이 붙은 중국집을 돌며 15년 먹은 군만두를 토할 때까지 다시 먹는다. 맛으로 감옥을 찾는다는 발상이 어이없는데, 15년이면 맛을 못 알아볼 리도 없다. 저녁 메뉴에서 만두가 빠졌다.
7.5층 복도
감금방 주인의 이를 뽑는 대목은 눈을 가렸다. 그다음이 유명한 복도다. 장도리 하나 들고 좁은 복도에 꽉 찬 사내들과 한 컷으로 삼 분 넘게 싸운다. 카메라는 옆에서 따라가기만 한다. 감독은 재개봉 때, 원래 화려하게 컷을 나눌 생각이었는데 시험 촬영 뒤 배우의 지친 모습을 보고 고립감 쪽으로 방향을 바꿨다고 했다. 등에 칼이 꽂힌 채 걸어 나오는 걸 보면 그 말이 이해된다. 해외 영화제에서 이 장면에 기립 박수가 나왔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우리 집에서는 빨래 개던 손이 멈춘 정도였다.
이우진
범인은 펜트하우스에 살고 느긋하게 요가 자세를 잡는다. 제한 시간은 닷새. 왜 가뒀느냐가 아니라 왜 풀어줬느냐를 물으라고 한다. 전화로는 모래알이든 바윗덩어리든 물에 가라앉기는 마찬가지라고 한다. 오대수는 졸업앨범에서 범인의 얼굴을 찾고, 고등학교 때 그 누나와 자기가 퍼뜨린 소문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 얘기를 전해 준 옛 친구는 전해 주자마자 죽는다. 여기쯤에서 빨래는 다 갰다.
보라색 앨범
미도가 누군지 밝혀진다. 네 살 때 헤어진 딸이다. 두 사람이 그렇게 만나 그렇게 된 것도 최면으로 짜 둔 일이었다. 오대수는 짖는 시늉까지 하며 빌다가 스스로 혀를 자른다.
여기서 한 번 정색하겠다. 복수극은 보통 가해자가 벌을 받는 순간 관객이 후련해지도록 설계되는데, 이 영화는 두 시간 동안 피해자라고 믿고 따라온 남자가 사실은 가해자였고 그 벌이 자기 딸에게 떨어졌다는 것을 맨 마지막에 알려 주면서, 후련함이라는 장르의 보수를 관객에게 한 푼도 주지 않는다. 그러니까 15년이 형이 아니었다. 풀려난 뒤가 형이었다.
설원
범인은 복수를 끝내고 엘리베이터 안에서 스스로 생을 마친다. 오대수는 최면술사를 찾아가 기억을 지워 달라고 한다. 눈밭에서 붉은 코트의 미도가 사랑해요, 아저씨, 하고 안는다. 웃는지 우는지 모를 얼굴로 끝. 개어 놓은 빨래를 도로 무너뜨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총평. 납치되고, 갇히고, 풀려나고, 찾고, 알고, 끝. 줄거리는 이게 다인데 두 시간이 짧다. 일본 만화가 원작이고, 반전 부분은 투자자에게 보여 준 대본에서조차 빼 놓았다는 얘기가 있다. 그 정도로 아낀 반전이니 아직 안 본 사람이 있다면 이 글은 여기서 닫고 영화부터 보시라. 두 시간 내내 보라색이 눈에 밟힌다. 처음의 우산도, 마지막의 앨범도. 복수극을 찾는 사람에게는 권한다. 다만 밥 먹으면서는 말고, 빨래도 미리 개 두고.
군만두는 결국 도로 냉동실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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