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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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우개 자국을 지우지 않았다
결론부터. 이 영화는 선을 닦지 않아서 좋고, 울리려고 애써서 싫다. 둘 다 사실이다.
나는 애니메이션의 깨끗한 선이 싫다. 정확히는 깨끗한 선만 있는 화면이 싫다. 누가 그렸는지 알 수 없게 다듬고 또 다듬어 사람 손이 지나간 흔적을 전부 지운 화면. 그 화면은 대개 예쁘고 대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림 그리는 아이들 이야기를 그런 선으로 그렸다면 나는 첫 장면에서 껐을 것이다.
싫은 것을 마저 적는다. 노력 장면에 깔리는 벅찬 음악. 천재를 천재라고 말해 주는 대사. 비극 뒤에 붙는 교훈 한 줄. 귀여움으로 때우는 조연. 죽음을 반전 카드로 꺼내 드는 각본. 깨끗한 선까지 여섯 개다. 이 영화는 이 중 셋을 피했고 둘을 저질렀고 하나는 반반이다.
피한 것 첫째. 선이다. 이 영화는 원화를 그린 사람의 거친 그림을 다듬는 단계 없이 그대로 색을 입혔다고 한다. 연필 선을 지운 지우개 자국이나 색 지정용 선처럼 보통은 지우는 제작 과정의 흔적을 일부러 남겼다고도 한다. 감독은 그리는 사람이 감정을 실어 그린 날것의 선을 남기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게 왜 맞느냐 하면, 이 영화의 주인공들이 하루 종일 하는 일이 바로 그 선을 긋는 일이기 때문이다. 학교 신문에 네컷 만화를 그리는 4학년 후지노의 선은 서툴고, 학교에 나오지 않는 동급생 쿄모토가 그린 배경의 선은 후지노가 보기에도 압도적이다. 그 차이를 보여 주는 영화가 자기 선은 매끈하게 닦아 놓았다면 거짓말이 됐을 것이다. 후지노가 그린 네컷 만화를 움직이는 그림으로 만들 때 감독은 4학년이 그 나이에 그릴 수 있는 수준이 어디까지인지를 생각했다고 했다. 못 그린 그림을 못 그린 채로 움직이게 하는 것. 이 영화의 가장 정직한 결정이다.
피한 것 둘째. 천재라는 대사다. 영화에서 쿄모토의 그림이 얼마나 좋은지는 누가 말해 주지 않는다. 신문에 나란히 실린 두 사람의 그림을 보여 주고, 그걸 본 후지노의 얼굴을 보여 주고, 그다음부터 책상 앞에 앉은 후지노의 등을 계속 보여 준다. 창밖 계절이 바뀌고 스케치북이 쌓인다. 그러다 후지노는 그만둔다. 재능이라는 말을 꺼내지 않고 재능의 차이를 보여 주는 데 성공한 장면이다.
피한 것 셋째. 교훈이다. 쿄모토는 고등학교를 마치고 주간 연재 제안을 거절한 뒤 미대에 가고, 2016년 1월 10일 그 미대에 들어온 남자에게 살해당한다. 영화는 여기서 흔히 하는 짓을 하지 않는다. 남은 사람이 죽은 사람의 뜻을 이어받아 더 큰 사람이 되는 그 흐름 말이다. 후지노는 연재를 멈추고, 쿄모토의 집에 혼자 가서, 어릴 적 자기가 그려 문틈으로 들여보냈던 네컷 만화를 찢는다. 그 만화가 쿄모토를 방 밖으로 불러냈고 그래서 쿄모토가 죽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이 자책에 대답을 주지 않는다. 마지막에 후지노는 책상 앞으로 돌아가고 카메라는 그 등을 오래 본다. 크레딧이 그 등 위로 올라간다. 감독은 이 장면이 후지노의 완전한 회복을 보장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고, 따로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지는 않다고 했다. 영화 어딘가에서 왜 그리느냐는 질문이 나오는데, 영화는 끝까지 그 답을 대사로 말해 주지 않는다. 좋다.
저지른 것 첫째. 음악이다. 솔직히 말하자. 후지노가 쿄모토의 팬 고백을 듣고 빗속 논길을 뛰어가는 장면에서 나는 영화가 내 등을 미는 걸 느꼈다. 감독 스스로 원작 만화는 음악이 없어 담담할 수밖에 없는데 영화는 관객이 집중을 유지하도록 감정 연출을 강화했다고 말했다. 그 말이 맞다. 강화됐다. 원작의 담담함을 좋아한 사람에게 이 장면은 한 발 넘친다. 나는 그 한 발이 아깝다. 이미 선으로 다 말한 것을 음악으로 한 번 더 말할 필요는 없었다.
저지른 것 둘째. 반전 카드다. 찢긴 조각이 문틈으로 들어가자 영화는 쿄모토가 방에서 나오지 않은 세계를 보여 준다. 그 세계에서 후지노는 만화 대신 운동을 계속했고, 사건의 날 미대에서 범인을 제압한다. 구급차에 실려 가는 후지노와 쿄모토가 처음 만난 날처럼 다시 만난다. 쿄모토는 그 장면을 네컷 만화로 그리고, 종이는 열린 창으로 날아가 원래 세계의 후지노에게 떨어진다. 이 대목을 두고 짧고 단순한 이야기에 꼭 필요하지는 않았다는 평이 있고, 나도 그쪽이다. 이유는 하나 더 있다. 그림을 그리지 않은 후지노가 영웅이 되는 세계를 보여 준다는 건, 그리는 일이 쿄모토를 죽였다는 후지노의 자책을 영화가 반쯤 받아 준 것이다. 교훈을 피한 영화가 여기서는 위로를 못 참았다. 이야기가 제 손으로 상처를 꿰매는 순간 관객이 할 일이 줄어든다.
반반인 것. 쿄모토다. 문이 열리고 처음 나온 쿄모토는 후지노의 팬이라며 사인을 청하고, 후지노는 쿄모토가 입은 옷의 등에 사인을 해 준다. 이 인물이 내내 귀엽고 가볍게만 그려진다는 비판이 있다. 반은 동의한다. 쿄모토가 왜 방에서 나오지 못했는지 영화는 자세히 캐묻지 않는다. 그런데 마지막에 후지노가 들어간 쿄모토의 방에는 후지노가 혼자 연재한 만화의 단행본과 관련 물건들이 있다. 헤어진 뒤에도 계속 읽고 있었다는 뜻이다. 쿄모토는 자기 사정을 한 번도 길게 설명하지 않지만, 그 방이 대신 설명한다. 대사로 하지 않고 물건으로 했다. 이건 귀여움으로 때운 게 아니다.
그런데도 내가 이 영화를 두 번 생각하게 되는 이유는 저지른 쪽이 아니라 피한 쪽 때문이다. 58분. 그중 영화가 진짜로 보여 주는 것은 책상에 앉은 등과 그 손에서 나오는 거친 선이다. 쌓이는 스케치북, 바뀌는 계절, 같은 구도로 돌아오는 책상. 음악이 넘치고 상상이 한 번 과했어도 그 선은 끝까지 닦이지 않았다.
울린다. 싫다. 그런데 선이 맞다. 모순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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