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2025
프로젝트 헤일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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촤르륵, 탁
솔직히 말하면 나는 이 영화를 줄자로 봤다. 인류의 운명이 걸렸다느니 태양이 꺼져 간다느니 하는 큰 이야기는 다 들었고 다 이해했는데, 극장을 나와서 머릿속에 남은 건 줄자 하나가 촤르륵 풀렸다가 탁 하고 돌아오는 소리였다. 〈프로젝트 헤일메리〉는 기억을 잃은 중학교 과학 교사 그레이스가 우주선에서 혼자 깨어나, 동료 둘은 이미 죽어 있고, 자기가 태양을 살리러 여기까지 왔다는 걸 서서히 알아차리고, 그러다 로키라는 외계인 공학자를 만나는 두 시간 반짜리 영화다. 두 시간 반이다. 그중에서 나는 한 십 초쯤 되는 줄자 장면만 머릿속에서 반복 재생하고 있다. 필 로드와 크리스토퍼 밀러가 감독을 했고 라이언 고슬링이 그레이스를 맡았고 로키는 제임스 오티스가 실물 인형으로 움직였다는 것도 다 안다. 아는데 줄자가 먼저다.
장면은 이렇다. 그레이스와 로키는 서로 다른 공기를 숨 쉬어서 같은 방에 있을 수가 없다. 로키는 암모니아를 마시고 사백 도가 넘는 열 속에 살고, 눈이 없고, 다리가 다섯 개다. 그 둘 사이에 로키가 만든 투명한 벽이 있다. 말이 안 통하니까 그레이스는 숫자부터 맞춰 보자고 시계와 줄자를 저쪽으로 건넨다. 길이의 단위를 비교해 보자는 뜻이다. 그런데 로키는 줄자를 받자마자 그걸 장난감으로 쓴다. 쭉 뽑았다가, 손을 놓는다. 촤르륵, 탁. 내 안의 무언가가 '저거다, 저게 이 영화다, 저걸로 쓴다' 하고 외치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초등학교 때 아버지 공구함의 줄자를 끝까지 뽑았다가 놓는 바람에 손가락을 맞아서 운 적이 있다. 그 뒤로 줄자는 나에게 측정 도구가 아니라 반격하는 동물이다.) 로키도 그랬다. 재라고 줬더니 놀았다. 그리고 돌아온 줄자는 로키 쪽 공기 때문에 뜨거워져 있어서, 그레이스는 그걸 만지고서야 저쪽이 암모니아냐고 묻는다. 길이를 재려고 건넨 물건이 온도를 알려 주고 돌아온 것이다. 나는 이 대목에서 벌써 이 영화 편이 됐다.

나는 당연히 이 영화가 만능 번역기를 꺼낼 줄 알았다. 외계인 영화의 정석 아닌가. 처음 삼십 분은 서로 못 알아듣다가 어느 순간 기계가 삑 하고 다 해결해 주는 것. 그런데 안 꺼낸다. 그레이스는 노트북에 로키의 화음 같은 소리를 하나씩 담아 단어를 맞추고, 로키는 그걸 배워서 말을 한다. 그것도 한 단어를 세 번씩 반복해서. 놀라움, 놀라움, 놀라움. 둘이 벽을 세 번 두드리는 걸로 살아 있다는 신호를 삼는 것도 좋았다. 똑똑똑, 똑똑똑. 나는 거기서 엉뚱한 걱정이 들었다. 저 외계인은 다리가 다섯 개인데 몸통까지 합쳐 여섯을 기준으로 세는 육진법 문명이라고 한다. 그럼 줄자의 눈금은 어떻게 읽었단 말인가. 십 센티미터를 로키는 뭐라고 셌을까. 세 번 두드리는 건 육진법으로도 세 번인가. 영화는 이 문제를 전혀 걱정하지 않는다. 나만 걱정했다. 나는 진지하게 걱정했다.
웃다가 정색한 장면은 포옹이다. 로키는 그레이스의 임무가 편도라는 걸, 그러니까 그레이스가 여기서 죽을 예정이라는 걸 알게 되고, 그걸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기 연료를 내놓는다. 그레이스는 울면서 벽 너머의 로키를 끌어안는다. 벽을 사이에 두고 하는 포옹이라 사실은 벽을 끌어안는 것이다. 로키는 어리둥절해하면서도 같이 벽에 몸을 붙인다. 그리고 묻는다. "포옹은 언제 끝나는 건지 어떻게 알아?" 나는 처음에 웃었다. 이건 감동계의 프리사이즈 같은 장면, 그러니까 누가 봐도 울라고 만든 장면에 외계인의 순진한 질문을 하나 얹어서 웃음으로 덮는 전형적인 수법이다, 라고 분류하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분류가 안 됐다. 포옹은 언제 끝나는가. 나는 사십 년 넘게 살면서 이걸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고, 한 번도 생각 안 했다는 사실에 조금 정색이 됐다. 줄자처럼 눈금이 있는 것도 아니고, 끝까지 가면 탁 하고 돌아오는 것도 아니다. 그냥 느끼는 거라고 그레이스는 답하고, 지금 느껴지냐고 로키가 묻고, 아니라고 그레이스가 답한다. 그 답은 로키한테도 나한테도 아무 도움이 안 됐다.
그레이스는 어떤 사람인가. 영화는 그가 교실에서 아이들에게 과학을 가르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안경을 코가 아니라 턱 쪽에 걸치다시피 하고 있어서 자꾸 눈이 간다. 그리고 영화 중반에 기억이 돌아오면서 밝혀지는 건, 이 사람이 영웅으로 자원한 게 아니라 무서워서 거절했고, 그래서 책임자가 약을 먹여 억지로 우주선에 태웠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줄자를 건넨 사람은 세상에서 제일 용감한 사람이 아니라 끝까지 뽑히기 싫었던 사람이었다. (영화에 그런 장면은 없지만, 나는 그가 약에 취해 실려 가면서도 주머니에 줄자를 챙겼을 것 같다. 없는데 나는 봤다.) 로키 쪽은 다르다. 로키는 자기 선원들이 죽는 걸 봤고 고치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레이스가 죽는다니까 그건 고치겠다고 한다. 둘 다 한 번씩 못 고친 적이 있는 사람들이 만난 거다. 그래서 둘이 벽에 손을 대고 있는 장면이 그렇게 길게 느껴졌나 보다.

마지막 장면 얘기를 해야겠다. 그레이스는 답을 찾고, 그걸 지구로 보내는 탐사선 네 대에 존, 폴, 조지, 링고라는 이름을 붙여 쏘아 보낸 다음, 자기는 지구로 돌아가지 않고 쓰러진 로키를 구하러 우주선을 돌린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 로키의 별에서, 바닷가처럼 꾸며 놓은 둥근 집 안에 산다. 둘이 나란히 앉아 바다를 보는 장면에서 로키가 이제 지구로 돌아갈 배가 준비됐다고 말하고, 그레이스는 생각해 보겠다고 하고, 로키는 오래 생각하라고 한다. 나는 여기서 좀 울었는데 이유는 모르겠다. 슬픈 장면도 아니다. 돌아갈 수 있다는 얘기를 하는 장면이다. 그런데 울었다. 그다음에 그레이스가 어린 외계인들한테 과학을 가르치는 장면이 한 번 더 붙는데, 그건 안 울고 봤다. 울 만큼은 이미 다 울어서 그랬을 것이다.

그래서 줄자다. 영화 내내 나는 그걸 로키가 가지고 논 장난감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마지막에 와서 보니 그레이스가 줄자였다. 지구에서 억지로 끝까지 뽑혀 나온 사람. 뽑힌 줄자는 손을 놓으면 돌아간다. 그게 줄자의 본능이고, 그레이스한테는 지구가 그 손이었다. 그런데 그는 탁 하고 돌아가지 않았다. 중간에서 멈춰서, 뜨거운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줄자가 제 손으로 멈추는 걸 나는 처음 봤다. 포옹이 언제 끝나는지 모르겠으면 안 끝내면 된다는 걸, 그 외계인은 벽에 몸을 붙인 채로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집에 와서 공구함의 줄자를 끝까지 뽑았다가 중간에서 손가락으로 눌러 세워 봤다. 삼 초쯤 서 있다가 탁 하고 돌아왔다. 손가락은 안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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