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2026
레지던트 이블: 0번째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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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배달 완료 사진이 싫다
나는 배달 완료 사진이 싫다. 현관 앞 바닥에 비스듬히 놓인 상자를 위에서 내려다보며 찍은 그 사진 말이다. 밤에 플래시를 터뜨려 찍은 것은 더 싫다. 신발장 옆에 상자를 세워 두고 각도를 비튼 사진은 참을 수 없다. 세상의 모든 배달 완료 사진은 못생겼다. 구도가 없고, 빛이 없고, 찍은 사람의 마음도 없다. 있는 것은 하나다. 나는 여기까지 했다는 증거. 그 증거만 남기고 사라지는 노동의 사진이 나는 오래 불편했다.
그래서 이 영화가 반가웠다. 레지던트 이블: 0번째 밤은 배달이 끝나지 않는 밤을 찍는다. 주인공 브라이언은 의료 택배 기사다. 구역 밖까지 가 주면 수당을 두 배로 주겠다는 제안을 받고 눈 내리는 심야에 라쿤 시티 종합병원으로 향한다. 가는 길에 도로로 뛰어든 사람을 친다. 죽은 줄 알았던 사람이 일어나 그를 덮친다. 하나인 줄 알았던 것들이 계속 늘어난다. 통신이 끊긴다. 상자는 아직 그의 손에 있다.
나는 이 영화를 좋아한다. 이유는 하나다. 이 영화는 끝까지 그 상자를 내려놓지 않는다. 주인공은 특별한 능력이 없다. 싸우는 법을 배운 적도 없다. 그가 가진 것은 가 봐야 할 주소 하나와, 자기가 무엇을 옮기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쥔 짐 하나다. 이것은 영웅의 조건이 아니라 배달 기사의 조건이다. 밤에 남의 도시를 가로질러 본 사람은 안다. 목적지가 있다는 것만으로 사람은 생각보다 멀리 간다.

솔직히 말하자. 이 영화는 뒤로 갈수록 무서움을 잃는다. 앞쪽 삼십 분은 눈과 어둠과 소리만으로 버틴다. 차 한 대, 눈발, 전조등 하나. 그 자리에서 이 영화는 아주 잘한다. 그러나 병원 안으로 들어가고 나면 공포가 점점 액션으로 갈아탄다. 피가 많아지고, 터지는 것이 늘어나고, 건물 옥상에서 뛰어내린 것들이 거리에 떨어져 뭉개진다. 많으면 무섭다는 착각이 여기 있다. 피는 많으면 그냥 많은 것이다.

따질 것이 하나 더 있다. 이 영화는 임신이라는 무서움을 초반에 깔아 놓는다. 여자친구가 아이를 가졌고 주인공은 그 사실 앞에서 도망치고 싶어 한다. 그러고는 하필 신생아실을 통과하게 만든다. 거기까지는 좋은 설계다. 그런데 그 공간에 들어간 영화는 이내 다른 일로 바빠진다. 아버지가 된다는 공포를 꺼내 놓고 끝까지 밀지 않는다. 꺼낸 물건은 치우든지 쓰든지 해야 한다.
그런데도 나는 이 영화를 좋아한다. 태도 때문이다. 이 영화는 주인공을 각성시키지 않는다. 그는 끝까지 서툴다. 서랍을 하나씩 열어 총알을 찾고, 남은 개수를 세고, 문이 열리지 않으면 다른 길을 찾는다. 어쩌다 한 번 크게 성공하고 나서 그가 내뱉는 말은 "비디오게임"이다. 영웅의 대사가 아니다. 얼떨떨한 사람의 대사다. 나는 이 얼떨떨함이 이 영화의 가장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눈 이야기도 해야겠다. 이 영화는 눈을 제대로 쓴다. 눈은 소리를 먹고, 자국을 남기고, 세워 둔 차를 덩어리로 만든다. 거리의 색은 가로등의 누런색 하나뿐이다. 멀리 보이지 않고, 뒤에서 오는 것이 들리지 않는다. 겨울밤의 배달이 왜 더 힘든지 아는 사람이 찍은 화면이다. 나는 날씨를 분위기용 소품으로 쓰는 영화를 싫어한다. 여기서 눈은 분위기가 아니라 조건이다.
게임을 옮겨 온 흔적도 적당하다. 나는 원작을 아는 사람만 웃는 장치를 대체로 싫어한다. 아는 사람에게는 인사가 되지만 모르는 사람에게는 통행료가 되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허브와 타자기를 그냥 지나가게 둔다. 설명하지 않고, 자막도 달지 않는다. 아는 사람은 알아보고 모르는 사람은 소품으로 본다. 팬서비스를 하려면 이 정도 거리는 두어야 한다.
반대로 거슬린 장치도 있다. 중간에 엄브렐러 직원이 등장해 이 사태가 실험실 사고에서 비롯됐고 몇 시간 만에 여기까지 왔다고 설명한다. 재난물은 꼭 이런 어른을 하나 집어넣는다. 상황을 아는 사람, 문서를 본 사람, 이름을 아는 사람. 그 사람이 입을 여는 순간 밤은 정보가 된다. 나는 이 영화가 끝까지 아무것도 모르는 밤으로 남았으면 더 좋았겠다고 생각한다.
내가 견디지 못하는 것들의 목록은 이렇다. 재난 한복판에서 지갑 속 가족사진을 꺼내 보는 손. 죽기 직전 각성해 전투 기술이 생기는 평범한 사람. 비를 맞으며 하늘을 올려다보는 얼굴. 희생자를 추모하는 느린 음악. 마지막에 도착해 모두를 구해 주는 군용 헬리콥터. 이 영화에는 그게 없다. 헬리콥터는 온다. 구해 주지는 않는다. 이 영화는 구조를 약속하는 대신 화면을 닫아 버린다.
품위란 자기가 맡은 일의 크기를 과장하지 않는 것이다. (물론 이 영화에서 그 일은 점점 커진다. 본인의 뜻과 무관하게.) 이 영화의 주인공은 세상을 구하러 나선 적이 없다. 그는 물건 하나를 가져다주러 나섰을 뿐이고, 그 사실을 끝까지 바꾸지 않는다. 결말은 그래서 더 고약하다. 그는 감염되고, 변해 버리고, 치료제를 만들던 사람들을 삼키고, 그 치료제까지 없앤다. 마지막 화면은 감염된 눈 하나다. 배달은 끝내 완료되지 않는다.
물건 이야기를 해야겠다.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소품은 녹색 의료 가방과 그 안의 짐이다. 디자인은 못생겼다. 낡은 군용 가방 같고, 십자가 하나가 붙어 있고, 밤길에서 전혀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런데 이 못생김이 맞다. 세상을 바꿀 물건은 보통 예쁘지 않은 가방에 담겨 움직인다. 주인공이 입은 것도 마찬가지다. 로고 하나 붙은 싸구려 패딩 점퍼, 털모자, 젖은 운동화. 만약 이 영화가 그에게 각 잡힌 전술 조끼를 입혔다면, 나는 이 영화를 용서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 가지 더. 이 영화는 웃기려 들지 않는다. 농담이 아주 없지는 않지만 양이 적고, 적은 쪽이 옳다. 공포 영화에서 농담은 관객에게 숨 쉴 틈을 주는 장치가 아니라, 감독이 자기 영화를 믿지 못할 때 꺼내는 보험이다. 이 영화는 그 보험을 거의 들지 않았다. 구십사 분. 짧다. 짧은 것도 태도다.
정리하자. 무섭다가 만다. 뒤가 앞보다 못하다. 깔아 놓고 거둬들이지 않은 것이 있다. 그런데도 좋다. 둘은 모순이 아니다. 나는 끝까지 상자를 놓지 않는 사람의 이야기에 약하다.
그리고 이 영화를 보고 나니 배달 완료 사진이 조금 달리 보인다. 여전히 못생겼다. 다만 그 사진이 못생긴 이유를 이제 알겠다. 그것은 작품이 아니라 보고서이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왔고, 놓고 갔고, 나는 살아서 돌아간다는 보고. 이 영화의 주인공은 끝내 그 사진을 찍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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