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2014
논스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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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비행기에서 하는 연설이 싫다
나는 연설이 싫다. 결혼식 주례사가 싫다. 시상식 수상 소감은 더 싫다. 비행기 안에서 하는 연설은 참을 수 없다. 청중이 도망칠 수 없는 곳에서 연설은 반드시 길어진다. 세상의 모든 연설은 출구가 잠긴 방에서 태어났다. 비행기는 그 방의 완성형이다. 좌석 벨트를 매라는 안내 방송조차 나는 한 문장쯤 줄일 수 있다고 믿는다. 면세품 안내도 연설이고 기장의 날씨 안내도 연설이다. 날씨는 창밖을 보면 안다.
「논스톱」의 첫 한 시간에는 연설이 없다. 문자만 있다. 뉴욕발 런던행 비행기, 4만 피트 상공. 항공보안관 빌 마크스의 보안용 휴대폰에 문자가 온다. 1억 5천만 달러를 보내지 않으면 20분마다 한 명씩 죽이겠다. 범인은 끝까지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 화면에 글자만 뜬다. 빌도 글자로 답한다. 드디어 누군가 악당의 본질을 찍었다. 악당은 말을 하지 않을 때 가장 무섭다. 20분 뒤 사람이 정말 죽고, 돈이 들어갈 계좌는 빌의 이름으로 되어 있다. 그때까지 아무도 연설을 하지 않는다. 나는 이 한 시간이 좋았다.
솔직히 말하자. 마지막 20분에 이 영화는 두 번 연설을 한다. 한 번은 빌이 한다. 승객들이 그를 테러범으로 몰아 제압하려 들 때, 그는 죽은 딸 이야기를 꺼내 객실을 설득한다. 한 번은 범인이 한다. 교사 톰 보웬은 9·11로 아버지를 잃었고, 군대에 다녀왔고, 미국의 항공 보안이 얼마나 허술한지 증명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둘 다 길다. 연설은 길면 그냥 길다. 악당에게 사연을 주면 영화가 깊어진다는 착각이 있다. 깊어지지 않는다. 느려진다. 그 전까지 영화가 쌓아 온 것은 침묵의 협박이었는데, 끝에 가서 모두가 마이크를 잡는다.
문자로 범인을 좁혀 가는 방법도 솔직히 느슨하다. 옆자리 승객 젠이 프로그래머 승객 잭 화이트를 소개하고, 화이트는 사진 파일에 바이러스를 심어 범인의 전화를 울리겠다고 한다. 10분 뒤 변호사 찰스 휠러의 주머니에서 전화가 울린다. 빌은 그를 멱살째 끌고 간다. 이 장면을 10대 승객이 찍어 인터넷에 올리고, 뉴스는 빌을 납치범이라 부른다. 그리고 휠러는 독침에 찔려 죽는다. 한 사람을 범인으로 몰았다가 그 사람이 죽는 순서를 영화는 세 번 반복한다. 동료 보안관, 기장, 변호사. 세 번째쯤에는 관객이 먼저 안다. 20분마다 한 명이라는 규칙도 폭탄이 나오는 순간 30분짜리 타이머로 바뀐다. 규칙을 바꾸려면 적어도 사과는 해야 한다. 이 영화는 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나는 이 영화를 좋아한다. 이유는 하나다. 빌은 계속 진다. 공항 주차장 차 안에서 위스키를 칫솔로 저어 마시는 남자로 시작해, 화장실에서 동료 보안관 해먼드에게 밀리고, 객실에서 뉴욕 경찰 라일리와 승객들에게 깔린다. 기장은 그에게 배지와 총을 내놓으라 한다. 상관은 그를 믿지 않는다. 승객 150명 중 그를 믿는 사람은 옆자리 하나와 승무원 하나다. 이 영화는 주인공에게 이기는 장면보다 지는 장면을 더 많이 시킨다. 그래서 그가 마침내 범인을 알아보는 순간이 값이 나간다.

나는 견디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한 방에 끝나는 주먹, 땀 한 방울 없는 얼굴, 총을 꺼내는 순간 조용해지는 객실, 주인공이 말하면 바로 고개를 끄덕이는 군중, 총알이 비켜 가는 몸. 이 영화에는 그게 없다. 좁은 화장실 격투는 카메라를 얼굴에 바짝 붙인 채 찍었고, 빌은 거기서 거의 죽는다. 총을 든 빌 앞에서 승객들은 손을 들긴 하지만 믿지는 않는다. 그는 휴대폰을 걷고, 문자를 읽고, 틀린 사람을 붙잡고, 다시 틀린다. 틀리는 주인공은 귀하다. 틀릴 때마다 값을 치르는 주인공은 더 귀하다.
그를 믿는 두 사람도 연설을 하지 않는다. 옆자리의 젠은 믿는다고 말하는 대신 고장 난 휴대폰을 고쳐 준다. 승무원 낸시는 그의 편에 서되 승무원의 일을 계속한다. 믿음은 말이 아니라 손으로 하는 것이다. 반대로 빌을 제압하려는 쪽은 말이 많다. 뉴욕 경찰 라일리가 앞장서고 남자 승객들이 따른다. 이 영화에서 목소리가 큰 쪽은 늘 틀린다. 뉴스도 틀리고, 상관도 틀리고, 객실의 다수도 틀린다. 조용한 쪽이 맞다. 나는 그 배분이 마음에 든다.
품위란 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진 다음에 변명하지 않는 것이다. 빌은 해먼드를 죽인 뒤에 그 가방에서 나온 코카인을 보고도 자기 손을 변호하지 않는다. 그냥 다음 20분으로 간다. (물론 검은 재킷도 도움이 된다. 품위의 절반은 옷이다.) 범인 보웬이 승객들에게 맞는 빌을 구해 주는 장면이 있다. 나중에 보면 그것도 계획이었다. 구원자가 범인인 영화는 많지만, 구원받는 쪽이 끝까지 고마워하지 않는 영화는 드물다. 빌은 고마워할 시간이 없다. 그게 이 인물의 멋이다.
물건 하나를 보자. 위스키 잔에 꽂힌 칫솔. 첫 장면에서 빌은 아침 위스키를 칫솔로 젓는다. 스타일 판정은 맞다. 술꾼의 비참함을 보여 주는 소품으로 이보다 작고 정확한 것을 나는 모른다. 플라스크였다면 멋을 부린 것이고, 빈 병이 굴러다녔다면 구걸이다. 칫솔은 둘 다 아니다. 이 남자는 양치를 할 생각이었고, 그 대신 술을 마셨다. 그 한 컷에 인물의 아침이 다 들어 있다. 이 영화가 빌에게 칫솔 대신 딸의 사진을 들고 울게 했다면 나는 이 영화를 용서하지 않았을 것이다. 영화는 대신 파란 끈 하나를 그의 주머니에 넣어 두고 설명하지 않는다. 죽은 딸이 어릴 적 쥐던 끈이다. 그 정도가 맞다.
젠의 두꺼운 검은 뿔테 안경도 맞다. 보웬의 투명 테 안경은 더 맞다. 범인이 쓰기에 저보다 무해한 안경은 없다. 반대로 승객들이 폭탄 주위에 짐을 쌓아 충격을 줄이는 장면은 틀렸다. 캐리어로 폭탄을 막는다는 발상은 우산으로 파도를 막는 것과 같다. 비행기 꼬리가 뜯긴 채 아이슬란드에 내려앉는 장면도 틀렸다. 150명 중 145명이 살았다는 숫자가 저 착륙에 어울리는가. 답은 하지 않겠다.
연설은 길다. 격투는 짧다. 영화는 좋다. 셋은 모순이 아니다. 한 시간 동안 아무도 말하지 않는 비행기를 찍어 놓고 마지막에 두 사람이 말을 하게 한 것은 이 영화의 실수다. 악당은 문자로 협박할 때 가장 무서웠고, 말을 시작하는 순간 그냥 사연 있는 남자가 됐다. 그래도 그 한 시간은 남는다. 빌이 휴대폰 화면을 노려보는 얼굴이 남는다. 나는 여전히 비행기에서 하는 연설이 싫다. 문자는 받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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