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2014
논스톱
작품 페이지에서 댓글 반응 보기 →
보는 눈은 누구 편인가
나는 비행기 모드를 켜는 순간을 좋아한다. 이륙 전 승무원이 지나가며 눈짓을 하면 나는 기꺼이 버튼을 누른다. 그 순간부터 몇 시간 동안 아무도 내게 닿을 수 없다. 상사도, 은행도, 단체 대화방도, 택배 기사도. 메일은 쌓이겠지만 쌓이는 것은 내 잘못이 아니다. 항공사의 잘못이다. 합법적으로 사라질 수 있는 시간이 세상에 몇 가지 남아 있고, 비행기 모드는 그중 가장 싼 것이다.
그런 내게 「논스톱」은 불길한 영화다. 휴대폰이 터지는 비행기에 관한 영화이기 때문이다. 아무도 사라질 수 없는 객실에서, 단 한 사람만 끝까지 보이지 않는 영화다. 승객 150명, 승무원 몇, 조종사 둘, 그리고 문자 한 통. 뉴욕발 런던행, 4만 피트. 연방 항공보안관 빌 마크스는 탑승 전 주차장 차 안에서 위스키를 칫솔로 저어 마신다. 자리에 앉는다. 보안용 휴대폰에 문자가 온다. 1억 5천만 달러를 보내지 않으면 20분마다 한 명씩 죽이겠다는 내용이다. 보낸 사람은 이 비행기 안에 있다. 어느 좌석인지는 모른다.
관객은 안다. 아니, 알 수 있었다. 탑승 전 터미널에서 빌은 두 사람을 스친다. 라이터를 빌리러 온 남자와 통화 중인 남자. 교사 톰 보웬과 프로그래머 잭 화이트. 둘이 범인이다. 빌은 둘을 보았다. 보았지만 읽지 않았다. 보안관의 눈은 그날 아침 위스키와 딸이 어릴 적 쥐던 파란 끈 쪽을 향해 있었다. 본다는 것과 읽는다는 것 사이의 거리가 이 영화의 상영 시간이다. 106분이다.
20분이 지난다. 사람이 죽는다. 화장실에서, 빌의 손에. 동료 보안관 해먼드가 가방에 코카인을 싣고 있었고, 빌은 그를 추궁하다 죽인다. 범인은 손 하나 대지 않고 첫 희생자를 얻는다. 돈이 들어갈 계좌는 빌의 이름이다. 기장은 그에게 배지와 총을 내놓으라 한다. 기장이 죽는다. 변호사가 죽는다. 둘 다 독침이다. 빌은 승객들의 휴대폰을 걷어 남의 문자를 읽는다. 그 사이 10대 승객 하나가 빌이 변호사를 다그치는 장면을 찍어 인터넷에 올린다. 뉴스는 그를 항공기 납치범이라 부른다. 호위 전투기가 따라붙는다.

휴대폰을 걷는 장면을 천천히 보자. 빌은 통로에 서서 승객들에게 전화기를 내놓으라 한다. 150명의 사생활이 한 사람의 손으로 모인다. 누가 누구에게 무슨 문자를 보냈는지, 어떤 사진을 저장했는지. 보안관이라는 직함이 그 열람을 허가한다. 그런데 같은 객실 어딘가에서 다른 한 사람이 빌을 읽고 있다. 그의 전화번호를, 그의 계좌를, 그의 동료가 가방에 무엇을 실었는지를. 보안관이 승객을 보는 동안 범인은 보안관을 본다. 누가 먼저 봤는가. 범인이다. 훨씬 먼저. 휴대폰을 내놓은 승객들은 손을 든다. 손을 든다는 것은 무기가 없다는 뜻이고, 동시에 더는 숨길 것이 없다는 뜻이다. 그 객실에서 범인도 손을 들었을 것이다. 누구보다 성실하게.
본다는 것은 의심한다는 뜻이다. 의심한다는 것은 상대보다 먼저 봤다는 뜻이다. 먼저 본 쪽이 이긴다. 이 영화는 범인을 찾는 영화가 아니라, 누가 누구를 먼저 보는지 겨루는 영화다. 옆자리의 젠은 빌을 믿어 주고 고장 난 휴대폰을 고쳐 준다. 프로그래머 승객 잭 화이트는 사진 파일에 바이러스를 심어 범인의 전화를 울리게 해 주겠다고 나선다. 돕는 사람이 둘이다. 둘 중 하나가 범인이다. 빌은 자기를 돕는 손을 보고 있었지, 그 손이 어디서 왔는지는 보지 않았다.

10대 승객이 올린 영상은 두 번 재생된다. 첫 번째는 뉴스에서다. 거기서 빌은 승객을 폭행하는 납치범이다. 두 번째는 빌의 손에서다. 같은 영상의 구석에서 교사 톰 보웬이 변호사에게 독침을 찌르고 주머니에 전화기를 넣는 손이 보인다. 화면은 같다. 보는 눈이 다르다. 한 번은 그를 가두고, 한 번은 그를 풀어 준다. 영상이 정의로운 것도 부당한 것도 아니다. 영상은 그저 찍힌 것이고, 편은 재생하는 사람이 정한다.
그러나 이 영화의 범인은 보는 눈을 늘리자고 말한다. 보웬은 9·11로 아버지를 잃었고, 군대에 다녀왔고, 이 나라의 항공 보안이 얼마나 허술한지 증명하려고 비행기 한 대를 통째로 걸었다. 감시를 뚫은 사람이 감시를 요구한다. 그 요구를 들어주려면 다음 비행기에선 더 많은 휴대폰이 걷히고 더 많은 문자가 읽힐 것이다. 그렇다고 빌이 반대편에 서 있는 것도 아니다. 그는 이미 휴대폰을 걷은 사람이다. 그리고 그 뒤에 승객들 앞에서 죽은 딸 이야기를 꺼내 자기를 믿어 달라고 한 사람이다. 감시의 반대말은 신뢰가 아니라 고백인지도 모른다. 범인과 수사관이 같은 결론을 두고 싸우는 영화를 나는 자주 보지 못했다. 둘은 서로를 쏘면서도 같은 민원을 넣고 있다.
비행기 밖으로 나와 보자. 우리는 하루에 몇 번 찍히는가. 엘리베이터에서, 편의점에서, 교차로에서, 아파트 현관에서, 남의 차 블랙박스에서, 단체 대화방의 캡처에서. 그 눈들이 우리를 지키는 날이 있고 우리를 묶는 날이 있다. 어느 날이 될지는 찍히는 쪽이 정하지 못한다. 억울한 사람에게 카메라는 증인이고, 억울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카메라는 증인이다. 다만 어느 쪽 증인인지는 재생 버튼을 누르는 사람의 손가락에 달려 있다. 이 영화에서 그 손가락은 마지막 순간에 빌의 것이 된다. 운이 좋았다. 영상을 찍은 10대는 빌을 고발하려고 찍은 것도, 구하려고 찍은 것도 아니다. 그냥 찍었다. 우리 시대의 증인은 대개 그렇게 태어난다. 의도 없이, 화질 좋게.
부기장이 고도를 8천 피트로 내리고, 폭탄은 터지고, 비행기는 꼬리를 잃은 채 아이슬란드에 내려앉는다. 150명 중 145명이 산다. 뉴스는 이제 그를 영웅이라 부른다. 아침엔 납치범, 저녁엔 영웅. 같은 사람, 같은 영상. 상관이 전화를 걸어 계좌에 들어온 돈을 묻는다.
무슨 돈?
그리고 젠이 말한다.
당신은 좋은 사람이야.
좋은 사람이라는 판정도 결국 누군가 내려 주는 것이다. 판정을 내리는 쪽은 늘 보는 쪽이고, 찍힌 쪽은 판정을 기다릴 뿐이다. 그 판정이 그날 아침과 저녁 사이에 뒤집힐 수 있다는 것을 이 영화는 106분 안에 보여 준다. 다음 비행에서도 나는 비행기 모드를 켤 것이다. 그것이 나를 숨겨 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 알면서 누르는 버튼이 세상에는 꽤 있다. 안전벨트처럼.
댓글
아직 댓글이 없어요. 첫 댓글을 남겨 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