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1990
아비정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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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망을 받는 쪽을 고른 사람
아비정전을 아비의 이야기라고 부르는 데 토를 다는 사람은 없다. 제목이 그렇다. 버림받은 아들이 자기를 낳은 사람을 찾아 필리핀까지 가고, 문 앞에서 돌아서고, 기차에서 죽는다. 이 줄거리에서 그를 키운 여자는 길목이다. 돈 받고 키웠고, 주소를 감췄고, 떠났다. 나는 그 여자에게 편지를 쓰기로 했다. 영화가 그 사람을 어디에 세워 두었는지 보고 싶어서다.
당신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부터 막힌다. 자료에는 레베카라는 이름이 적혀 있고, 영화를 본 사람들은 아비의 양어머니라고 부른다. 나도 그렇게 부른다. 이름 대신 역할로 불리는 것이 당신이 이 영화에서 받은 첫 번째 대우다.
아비를 낳은 여자는 그가 성인이 될 때까지 달마다 50달러를 보냈고, 당신은 그 돈을 받으며 그를 키웠다. 영화는 이 사실을 숨기지 않는다. 그런데 돈이 끊긴 뒤에도 아비는 당신 집에 산다. 그 이유를 영화는 설명하지 않는다. 설명하지 않는 것이 설명이라고 나는 읽었다.
아비가 낳은 여자의 주소를 달라고 할 때마다 당신은 주지 않았다. 「날 실컷 미워해라, 적어도 날 잊지는 않을 테니」. 당신이 한 말이다. 이 말을 붙잡아 두려는 집착으로 읽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나는 다르게 보았다. 잊히는 것과 미움받는 것 중에 하나를 골라야 하는 사람이 있다. 당신은 미움받는 쪽을 골랐다. 고르는 것 자체가 사치인 사람도 있지만, 당신에게는 그 둘밖에 없었다.
당신에게는 젊은 애인이 있었다. 그에게 당해 취한 채 들어온 당신을 보고 아비가 그를 찾아가 때리고 진주 귀걸이를 되찾아 왔다. 그 귀걸이를 아비는 댄서 루루에게 보여 주고, 그녀를 집으로 데려왔다. 당신의 귀걸이가 당신이 모르는 사이에 아들의 연애 도구가 됐다. 영화는 이 일을 당신 쪽에서 보여 주지 않는다. 당신이 그 귀걸이를 다시 봤는지, 그 뒤에 어디에 두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당신은 나이 많은 부자와 미국으로 가기로 했다. 아비가 그 앞에서 또 주소를 요구했고, 이번에는 당신이 편지를 내줬다. 집은 너에게 남기고 돈은 달마다 보내겠다고 당신은 말했다. 그리고 네가 내 친자식이 아니라서 언젠가 떠날 줄 알았는데 이렇게 아까울 줄은 몰랐다고. 그 사람들은 처음부터 너를 원하지 않았고, 원했다면 벌써 찾아왔을 거라고. 나는 이 말을 오래 붙들었다. 당신은 주소를 감춘 것이 아니라 이 문장을 감춘 것이다. 주소는 종이 한 장이지만 이 문장은 아비의 전부를 바꾼다. 그리고 영화는 당신이 옳았음을 필리핀에서 증명한다. 아비는 그 집 문 앞까지 가고, 문은 열리지 않는다.
루루가 당신을 찾아온 일이 있다. 사랑에 매달리는 자기가 어리석은 거냐고 묻자 당신은 아니라고, 젊었을 때 나도 그랬다고 답했다. 아들의 질문에는 몇 번이고 대답을 미뤘던 사람이, 아들이 버린 여자의 질문에는 바로 답한다. 이 장면을 영화는 짧게 지나간다. 나는 거기서 오래 멈췄다.
당신이 미국에서 어떻게 됐는지 영화는 말하지 않는다. 당신을 연기한 배우는 십 년 뒤 같은 감독의 화양연화에서 셋집 주인으로 다시 나온다. 거기서 그녀는 세 든 여자에게 조심하라고 충고한다. 같은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그 충고를 들으며 당신을 떠올렸다. 젊었을 때 나도 그랬다고 말한 사람이, 다음 영화에서 그러지 말라고 말하는 사람이 됐다고 읽으면 과한 풀이일 것이다. 과한 줄 알면서 적는다.
편지를 쓰고 나서 다시 묻는다. 영화는 이 사람을 무엇으로 썼는가. 세 가지로 썼다. 아비가 왜 그런 사람인지 설명하는 배경으로 썼다. 돈을 받고 키운 여자가 있고, 그래서 아비는 누구에게도 머물지 않는다는 식의 설명이 성립한다. 주소를 쥔 문지기로 썼다. 그녀가 편지를 내주는 순간 이야기는 홍콩에서 필리핀으로 옮겨 간다. 그리고 희생으로 썼다. 아비에게 맞은 애인, 빼앗긴 귀걸이, 아들에게 남긴 집. 그녀가 잃는 것들은 아비의 이야기를 굴리는 연료가 된다.
그녀의 자리에서 보면 이야기는 이렇게 달라진다. 낳은 여자는 돈을 보내는 것으로 아들을 밀어냈고, 키운 여자는 주소를 감추는 것으로 아들을 붙들었다. 둘 다 아들을 자기 손 안에 두는 방법이다. 아비는 두 여자 사이에서 한쪽만 어머니로 쳤다. 돈을 보낸 쪽이다. 영화도 거기에 동의하는 것처럼 보인다. 필리핀 저택 앞에서 돌아서는 아비의 뒷모습은 길고 느리게 찍혔다. 그 느린 걸음이 향하는 곳은 낳은 여자 쪽이다. 키운 여자는 그 걸음의 출발점일 뿐이다.
그런데 영화가 끝나고 남는 집은 그녀의 집이다. 아비는 기차에서 죽고, 낳은 여자는 얼굴도 보여 주지 않고, 미국으로 간 여자만 집과 달마다의 돈을 남겼다. 버린 쪽도 돈을 보냈고 키운 쪽도 돈을 보내겠다고 했다. 같은 돈이 한쪽에서는 떼어 내는 돈이고 한쪽에서는 붙드는 돈이다. 이 차이를 영화는 말로 하지 않는다. 알아보는 일은 보는 사람의 몫으로 남겨 두었다. 나는 그것이 이 영화가 이 사람을 놓친 방식이면서 동시에 놓치지 않은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내 풀이가 틀릴 수 있는 지점은 여기다. 영화가 일부러 남겨 둔 것인지, 속편을 찍지 못해 그냥 남은 것인지 나는 가릴 수 없다. 속편이 계획됐다가 만들어지지 않은 영화다.
원망을 받는 쪽을 고른 사람에게 영화는 무엇을 돌려주었나. 집 한 채와 짧은 대답 하나. 그것이 충분한지 나는 아직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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