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2026

소실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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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사람은 누구인가

고요한땀· 2026. 10. 11.· 3,390자

우리 집 현관에는 도어록이 달려 있다. 여섯 자리를 누르면 열린다. 그 여섯 자리를 삼 년째 바꾸지 않았다. 바꿀 이유를 못 찾아서가 아니라 바꾸는 일이 귀찮아서다. 도어록이 지켜 주는 것이 무엇인지도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짐작건대 나의 신발장, 나의 수면, 그리고 나의 게으름일 것이다.

그런 내게 이 영화는 성가신 질문을 하나 남겼다. 사라진 사람을 찾아내는 영화가 아니라, 사라진 줄도 몰랐던 사람들이 뒤늦게 발견되는 영화다. 제목이 가리키는 사람은 끝까지 한 명으로 고정되지 않는다. 처음에는 죽어서 치워진 노인인 줄 알았다가, 중간에는 계단에서 없어진 아이인 줄 알았다가, 나중에는 그 둘 다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낡은 아파트 한 동이 무대다. 아홉 살 당눠가 아침에 계단을 내려간다. 아버지 당위는 아이의 뒷모습을 본다. 아이는 건물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복도 카메라에도 찍히지 않는다. 같은 건물에 살던 린위통은 그보다 앞서 자기 집 안에서 범죄를 당했다. 문도 창문도 멀쩡했다. 그는 곧 그 집을 떠나 남에게 세를 놓는다. 그 집에 옌우와 그의 아버지가 들어온다. 아버지는 뇌경색으로 죽고, 옌우는 그 죽음을 밖에 알리지 않는다. 세 가지 일은 서로를 모르는 채로 같은 주소 위에 포개져 있다.

소실점 스틸컷

이야기는 세 줄기를 번갈아 보여 준다. 시간도 앞뒤로 접힌다. 140분 가운데 앞의 상당 부분은 관객에게 정보를 나누어 주지 않는 데 쓰인다. 불친절하다는 뜻이 아니다. 세 사람이 서로에 대해 모르는 딱 그만큼만 관객도 모르게 해 둔다는 뜻이다. 그래서 앞부분은 어수선하다. 그 어수선함이 이 건물의 실제 상태다.

연출을 맡은 사람은 대만에서 〈목격자〉와 〈메리 마이 데드 바디〉를 찍은 감독이다. 전작의 제목 하나가 이 영화 위에 그대로 포개진다. 목격자. 이 건물에는 목격자가 가득하다. 계단을 오르내리는 사람, 창밖을 내다보는 사람, 복도에 달린 카메라. 목격자가 그렇게 많은 곳에서 아이 하나가 없어진다. 목격은 성립했는데 증언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 사이의 거리가 이 영화의 폭이다.

소실점 포스터

내가 오래 붙들린 것은 아이 얼굴의 상처다. 당눠의 얼굴에는 늘 상처가 있다. 아이가 없어지자 사람들은 그제야 그 상처를 꺼내 읽기 시작한다. 집에서 맞은 것이 아니냐. 아버지가 수상하지 않으냐. 그러나 상처는 내내 거기 있었다. 아이가 매일 그 얼굴로 계단을 오르내리는 동안 아무도 그것을 읽지 않았다. 사라진 다음에야 상처는 증거가 된다. 증거가 되기 전까지 그것은 그냥 아이 얼굴이었다.

본다는 것은 눈에 담는다는 뜻이다. 눈에 담는다는 것은 대개 담아 두고 잊는다는 뜻이다. 잊는다는 것은 그 사람이 거기 없는 것과 같아진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없어져야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매일 마주쳐도 사라질 수 있다. 이 영화에서 가장 성실한 목격자는 복도에 달린 카메라다. 그 카메라는 하루도 쉬지 않고 돌아간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린위통의 사건은 가장 조용하게 설명된다. 그는 옆집 남자가 자기 집을 손보는 광경을 본다. 손이 야물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기 집 공사를 그에게 맡긴다. 설명은 이것이 거의 전부다. 나쁜 판단이 아니다. 나라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가까이 사는 사람에게 일을 맡기는 것은 합리적이다. 견적을 여러 군데 받을 필요도 없고, 문제가 생기면 걸어가서 따지면 된다. 재난은 비합리에서 오지 않는다. 생활인의 합리적인 선택 하나가 그대로 통로가 된다. 그 뒤로 그는 집을 옮기고, 방문을 안에서 잠그고, 집이라는 말을 처음부터 다시 배운다.

옌우의 자리는 다른 방식으로 아프다. 그는 일이 없고 빚이 있다. 아버지가 죽은 뒤 그의 머릿속에서는 끔찍한 장면이 몇 번이고 재생된다. 영화는 그 장면을 실제처럼 보여 주었다가 한참 뒤에 환각이었다고 알려 준다. 처음에는 속았다는 기분이 들고, 조금 지나면 그편이 더 무섭다. 그는 그 일을 하지 않았다. 다만 그 일을 끝까지 상상했다. 상상과 실행 사이를 막아선 것이 도덕인지 담력인지, 영화는 판정하지 않는다. 판정하지 않는 쪽이 정직하다.

이웃이란 무엇인가. 사전에는 가까이 사는 사람이라고 적혀 있을 것이다. 영화는 거기에 한 줄을 덧붙이자고 한다. 가까이 살기 때문에 도리어 묻지 않게 된 사람. 이 건물 사람들은 아이 얼굴의 상처를 묻지 않는다. 혼자 살던 여자가 갑자기 이사를 가도 묻지 않는다. 옆집 노인이 어느 날부터 보이지 않아도 묻지 않는다. 묻지 않는 것은 보통 예의라고 불린다. 예의는 편하다. 편해서 아무도 바꾸지 않는다. 나의 도어록 번호처럼.

그렇다고 이 영화가 이웃을 의심하라고 말하는 것 같지는 않다. 의심이라면 이미 충분히 나온다. 아이를 잃은 부부는 서로를 의심한다. 피해를 입은 사람은 방문을 안에서 잠근다. 사람들은 아버지를 의심한다. 그 의심들이 밝혀낸 것은 거의 없다. 끝내 안쪽이 열리는 것은 누군가 마침내 묻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범인의 어린 딸은 아버지의 방을 신고할 수 있는 상태로 만들어 둔다. 면회실에서 아버지는 딸에게 아비를 고발한 것이 그렇게 자랑스럽냐고 묻는다. 영화는 그 물음에 답하지 않고, 딸을 아이 잃을 뻔한 집에 들여보낸다. 딸은 아버지를 고르지는 못했고 집은 골랐다.

영화가 끝나면 자막이 하나 올라온다. 극 중에 나온 사설 마작방 업자들이 모두 검거되었다는 문장이다. 단정하고 완결된 문장이다. 제도의 문장은 대개 이렇게 생겼다. 나쁜 것은 적발되었고 질서는 회복되었다. 그 문장 안에서는 아무도 사라지지 않는다. 방금 두 시간 넘게 본 것은 그 문장이 끝내 닿지 못하는 자리에서 벌어진 일들이었다. 검거되는 것은 업자이고, 사라지는 것은 아이와 노인과 혼자 사는 여자다.

원작 소설의 제목은 말미잘이라고 한다. 말미잘은 소라게의 껍데기에 붙어서 산다. 껍데기가 작아지면 더 큰 껍데기로 옮겨 탄다. 붙어사는 쪽은 겉보기에 아무 해도 끼치지 않는다. 영화는 그 제목을 버리고 사라진 사람이라는 제목을 택했다. 누가 붙어사는가를 묻는 대신 누가 없어졌는가를 묻기로 한 셈이다. 두 질문은 생각보다 가깝다. 누군가 조용히 붙어사는 동안 누군가는 조용히 없어진다.

소실점은 본래 그림 그리는 사람들이 쓰는 말이다. 나란한 선들을 멀리까지 늘여 그리면 저 끝에서 한 점에 모이는 것처럼 보인다. 그 점이 소실점이다. 실제로 거기에 무엇이 놓여 있지는 않다. 선들이 그렇게 보이도록 약속된 자리일 뿐이다. 이 영화의 세 줄기도 한 점에서 만난다. 그런데 막상 그 자리에 가 보면 거창한 악이 버티고 서 있지 않다. 돈이 없어서, 들킬까 봐, 묻기 귀찮아서 한 선택들이 겹쳐져 있을 뿐이다. 큰 악이 없어도 사람은 사라진다. 이것이 이 영화가 가장 불친절한 방식으로 알려 주는 사실이다.

나는 오늘도 도어록 번호를 바꾸지 않을 것이다. 바꾼다고 달라질 것이 없어서가 아니다. 그저 귀찮아서다. 그 귀찮음이 이 건물에서 가장 두꺼운 문일지 모른다. 문은 생각보다 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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