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 2023
어떻게 해야 했을까?
작품 페이지에서 댓글 반응 보기 →
다큐멘터리는 설명해 주는 줄 알았다
고백부터 한다. 나는 다큐멘터리를 잘 안 본다. 두 시간 내내 누가 나를 가르치는 기분이 들어서 자꾸 자세를 고친다. 그래서 이 영화도 미루고 미뤘다. 조현병을 앓은 누나와 그 가족을 20년 넘게 찍었다는 말만 듣고, 아 그거 무겁고 교훈적이겠구나, 하고 지레 겁을 먹었다.
아무튼 「어떻게 해야 했을까?」를 봤다. 그리고 첫 몇 분 만에 내 예상이 틀렸다는 걸 알았다. 영화는 시작하자마자 자막으로 선언한다. 이 영상은 누나가 조현병이 된 이유를 밝히려고 만든 것이 아니라고. 조현병을 설명하는 영화도, 대처법을 알려 주는 영화도 아니라고. 그러니까 내가 겁냈던 그 「가르침」을 영화가 먼저 사양한 셈이다. 좀 그랬다. 그럼 나는 뭘 들고 이 영화를 봐야 하나.
몰랐던 것
몰랐던 게 많았다. 우선 이 영화는 병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병이 생긴 사람 곁에 있던 세 사람, 즉 부모와 남동생이 어떻게 움직였는지에 관한 이야기다. 감독이 인터뷰에서 직접 그렇게 말했다. 문제는 누나가 아니라 곁에 있던 부모와 자기 자신에게 있었다고.
줄거리는 단순한데 그 단순함이 무섭다. 1983년, 의대에 다니던 누나가 어느 저녁 갑자기 소리를 지른다. 부모는 둘 다 의사이자 의학 연구자다. 그런데 딸을 정신과에 데려가지 않는다. 병이 아니라고 한다. 남동생은 1992년 대학 4학년 때 학생상담실 상담사의 권유로 부모를 설득해 누나 치료를 시작해 보려 했지만, 아버지의 반대로 무산된다. 그 뒤로 집은 조용해지고 누나는 집 안에 머무르게 된다. 2001년부터 남동생이 카메라를 들고, 2008년에야 누나가 정신과 병원에 입원해 석 달 치료를 받고 좋아진다. 처음 소리를 지른 날로부터 25년 뒤다.
25년. 나는 이 숫자를 들었을 때 화가 났다. 의사 둘이 사는 집에서 아무도 진료를 받지 못했다는 게 말이 되나. 그런데 영화는 내가 화내기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 그냥 다음 장면으로 간다.
찾아본 것
보고 나서 세 가지를 찾아봤다. 입문자의 숙제라고 생각하고 적어 둔다.
첫째, 부모가 어떤 사람들이었나. 기사에 따르면 두 사람은 모두 의사 면허를 가진 의학 연구자였고, 그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들이었다. 감독은 인터뷰에서 부모가 딸의 병을 창피해했고 사회적 낙인을 극도로 두려워했으며 친척에게조차 누나의 병을 설명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이건 몰라서 못 한 집이 아니다. 알아서 안 한 집이다. 이 사실을 알고 보면 아버지가 조리 있게 말할 때마다 더 답답해진다.
둘째, 2008년에 효과가 있었던 약. 감독은 누나가 입원해서 호전된 뒤, 그 약이 일본에서 1996년에 승인된 약이라는 걸 알게 됐다고 했다. 12년 먼저 쓸 수 있었던 약이다. 영화 안에서 이 숫자를 들고 누구를 때리지는 않는다. 그래서 더 아프다.
셋째, 이 영화가 어떻게 세상에 나왔나. 감독이 영상 공개를 처음 생각한 건 2008년, 누나가 퇴원하고 치료 효과가 보이기 시작한 뒤였다고 한다. 그저 고통스럽기만 한 기록으로 끝나지 않을 가능성이 그때 생겼다는 것이다. 일본에서는 2024년 12월에 개봉해 작은 영화관에서 시작했고, 한국에서는 올해 7월 말에 극장에서만 걸렸다. 러닝타임은 101분이다. 참고로 음악이 전혀 없다. 감정을 이끌어 줄 선율이 한 줄도 깔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여기서 몰라도 되는 것과 알아야 더 좋은 것을 가른다면 이렇다. 조현병의 의학적 설명은 몰라도 된다. 영화가 그걸 하지 않겠다고 첫머리에 못을 박았으니 나도 억지로 공부하지 않았다. 대신 부모가 의사였다는 것, 그리고 1980년대 일본에서 정신병을 가족 바깥에 알리는 일이 얼마나 어려웠는지는 알고 보는 쪽이 낫다. 그 둘을 알면 이 집의 침묵이 단순한 무지가 아니라 선택이었다는 게 보인다.
그래서
입문자가 막히는 장면이 있다. 남동생이 아버지에게 이대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아버지가 앞뒤가 맞는 듯한 논리로 되받고, 같은 자리를 돌고 또 도는 장면들이다. 나는 여기서 몇 번 한숨을 쉬었다. 결론이 안 난다. 영화도 결론을 내 주지 않는다. 그런데 감독이 편집하면서 깨달았다는 말이 힌트가 됐다. 서로 상대방이 하는 말을 듣고 있지 않더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 장면들은 누가 이기나를 보는 장면이 아니다. 누가 누구의 말을 안 듣고 있는지를 보는 장면이다. 그렇게 보기 시작하니 지루함이 다른 것으로 바뀌었다. 나도 집에서 저렇게 말하고 있지 않나, 하는 것으로.
퇴원한 누나는 장을 보고 요리를 하며 지냈다고 한다. 그리고 2021년,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예순둘이었다. 영화의 맨 끝에서 남동생은 아흔을 넘긴 아버지를 휠체어에 앉혀 놓고 묻는다. 왜 누나를 병원에 보내지 않았느냐고. 정신병원에서 학대받을까 걱정해서였느냐고. 아버지는 그런 면이 있었다고 답한다. 그리고 엄마가 그렇게 말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25년짜리 질문에 돌아온 답이 그 정도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이 영화를 보며 두 번 졌다. 한 번은 가르쳐 줄 줄 알았는데 안 가르쳐 줘서, 또 한 번은 안 가르쳐 주는데도 내가 뭔가를 배워 버려서. 누가 이렇게 말을 아껴 가면서 사람을 바꾸나. 부럽고 얄밉다.
원래 이 자리에 다음에 볼 작품을 추천하기로 했다. 그런데 이 영화 뒤에 바로 다른 영화를 붙일 마음이 안 났다. 그냥 며칠 비워 두는 게 이 영화를 본 사람의 예의인 것 같다.
카메라 뒤에 서 있던 사람, 당신은 20년 동안 기록했다. 그걸로 충분하다는 말은 차마 못 하겠다. 그래도 그 기록이 없었으면 이 질문은 아무에게도 도착하지 못했을 거다.
어떻게 해야 했을까. 나는 아직 답을 못 썼다.
댓글
아직 댓글이 없어요. 첫 댓글을 남겨 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