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2025
리틀 드래곤:몬스터섬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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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은 주지 않고 섬은 지켰다
어린이 모험 영화가 어린이에게 거는 약속은 무엇인가. 나는 이 질문 하나를 들고 74분을 앉아 있었다.
먼저 작품을 가려 두자. 노르웨이의 오래된 동화책을 옮긴 애니메이션으로, 본국에서는 2025년 가을에 걸렸고 우리나라에는 올해 전체관람가로 들어왔다. 수영을 못하는 어린 바다 드래곤 루피가, 섬을 가려 주던 마법 목도리가 망가지자 새 목도리를 떠 줄 사람을 찾아 스코틀랜드까지 가는 이야기다. 줄거리는 이것으로 충분하다. 내가 보려는 것은 줄거리가 아니라 약속이다.
약속
장르마다 관객과 맺는 계약이 있다. 스릴러는 긴장을 팔고 로맨스는 결합을 판다. 어린이 모험물의 계약서에는 두 조항이 있다고 나는 본다. 첫째, 못하는 아이가 끝에는 하게 된다. 둘째, 그 과정에서 어린 관객은 다치지 않는다. 악당은 무섭되 우스꽝스러워야 하고, 위기는 크되 안전해야 한다. 이 두 조항을 지키는 대가로 어른들은 표를 산다. 이 영화는 첫째 조항을 성실하게 지키고, 둘째 조항을 두 군데서 어긴다. 고백하건대 나는 어긴 쪽이 더 좋았다.
영화는 첫째 조항의 전제를 일찍 깔아 둔다. 나이 든 바다 드래곤 둘이 루피를 두고 초록 벌판쯤 되는 별명으로 부르며 웃는 장면이다. 이름 대신 별명으로 불리는 아이, 그것이 이 장르에서 주인공이 되는 자격이다. 남들이 다 하는 수영을 혼자 못 하는 아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계약서의 서명란은 여기서 채워진다.
이행
약속이 지켜지는 자리는 뜻밖에도 루피가 아니라 거북이에게 있었다. 동물원 우리 안에서 체스를 두던 그 거북이가, 탈출한 동물들을 바다 건너로 실어 갈 고래를 말로 설득해 낸다. 평생 체스판만 들여다보던 머리가 우리 밖에 나와 처음으로 쓸모를 얻는 순간이다. 나는 이 대목에서 만든 이들의 손을 상상했다. 어느 회의실에서 누군가가 거북이는 왜 체스를 두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것이고, 그 답으로 이 장면을 적어 넣었을 것이다. 물론 상상이다. 그러나 사소한 설정이 뒤에 가서 값을 치르는 것, 그것이 이 장르의 성실함이다.
루피 자신의 이행은 더 간결하다. 문어 친구가 그를 물속으로 밀어 넣으며 바다 드래곤은 원래 헤엄치도록 태어났다고 말해 준다. 수영 교습은 그것으로 끝이다. 길게 끌지 않은 것이 좋았다. 첫째 조항이 지켜지리라는 것은 관객도 알고 영화도 안다. 아는 것을 오래 끄는 영화만큼 어린 관객을 얕보는 것이 없다.
배반
둘째 조항이 처음 깨지는 자리는 동물원장이다. 이 여자는 우스꽝스럽지 않다. 루피를 두고 그저 짐승일 뿐이라는 뜻의 말을 하고, 달아나는 동물들 뒤로 마취 화살을 쏘고, 급기야 대포까지 끌고 나온다. 해외의 한 관객평에는 어린아이들에게 몇몇 장면이 꽤 무서울 수 있다는 말이 있었고, 다른 어린 관객은 하나도 안 무섭고 조금 길었다고 적었다. 두 평이 다 맞을 것이다. 나는 전자의 편에 서서, 그래도 쏘는 쪽이 옳았다고 말하고 싶다. 악당이 정말로 쏘지 않으면 탈출은 놀이가 되고, 놀이에서 풀려난 동물들에게 바다는 아무것도 아니다. 대포가 있어야 바다가 값을 가진다.
두 번째 배반은 더 근본적이다. 장르는 보통 세 번째 조항을 몰래 끼워 넣는다. 끝에 가서 주인공 혼자 세상을 구한다는 조항이다. 이 영화는 그 조항을 찢는다. 목도리가 사라지고 삼촌이 감기로 앓아눕자 섬 주민들은 이제 끝장이라며 짐부터 싸서 달아날 궁리를 한다. 루피는 묻는다. 왜 바다 드래곤들은 서로를 위해 나서지 않는가. 그리고 결말에서 루피는 다가오는 배를 혼자 밀어 보지만 배는 밀리지 않는다. 섬의 모두가 함께 밀 때에야 배가 돌아선다. 주인공은 영웅이 되지 못했다. 대신 주민이 되었다.
나는 이 배반이 질투가 날 만큼 영리하다고 생각한다. 수영을 갓 배운 아이가 혼자 배를 밀어 돌려세웠다면 첫째 조항은 완벽하게 이행되었을 것이고, 영화는 그 자리에서 하나 마나 한 것이 되었을 것이다. 못하던 것을 하게 된 아이가, 그래도 혼자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같은 장면에서 배운다. 이런 결말은 어른 영화도 좀처럼 해내지 못한다. 나라면 못 했다.
한계도 적어 두어야 공정하다. 본국의 한 평자는 원작 삽화의 기묘하고 장식적인 선이 둥글고 매끈한 요즘 애니메이션의 얼굴로 바뀐 것을 아쉬워했다. 동의한다. 이 영화의 루피는 다른 여러 영화의 누군가와 닮았다. 그러나 그 매끈한 얼굴 뒤에서 대포를 쏘고 영웅을 거절하는 것이니, 얼굴은 약속대로 주고 속은 약속을 어긴 셈이다. 나는 그런 영화를 편든다.
볼까 말까 묻는다면, 아이와 함께라면 보라. 혼자라면 노을이 고운 애니메이션 한 편을 보았다 치면 된다. 다만 대포가 나올 때는 아이 손을 잡아 주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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