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2025
노보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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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지 않은 남자를 변호하는 일
질문은 이것이다.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남자가 주인공인 액션 영화에서, 관객은 무엇을 걱정해야 하는가. 주인공이 다칠까를 걱정할 수는 없다. 그는 다쳐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 영화의 긴장은 어디서 오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줄거리를 조금 충실하게 적어 둔다. 반론과 변호가 모두 이 줄거리에 기대기 때문이다.
네이선 케인은 은행 부지점장이다. 선천적으로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희귀 질환을 갖고 있고, 학창 시절 친구들은 치과 마취제 이름을 따서 그를 노보케인이라 불렀다. 그는 혀를 씹을까 봐 부드러운 음식만 먹고, 세 시간마다 화장실 알람을 맞추고, 집과 사무실의 모서리를 전부 감싸 놓고 산다. 창구 직원 셰리가 그에게 점심을 청하고, 두 사람은 술집을 거쳐 밤을 함께 보낸다. 셰리는 그에게 체리파이를 먹게 한다. 다음 날 산타 복장을 한 세 사람이 은행을 털고, 지점장을 쏘고, 출동한 경찰들을 쏘고, 셰리를 데려간다. 네이선은 그들을 쫓는다. 식당 주방의 튀김기, 타투숍에서의 고문, 함정을 잔뜩 깔아 둔 집을 차례로 지나며 그는 자기 몸을 도구처럼 쓴다. 온라인 게임으로만 알던 친구 로스코가 처음으로 실제 얼굴을 보고 동행하고, 형사 둘이 뒤를 따른다. 중반에 반전이 온다. 셰리는 강도 일당의 리더 사이먼의 공범이었다. 금고 번호를 얻으려 네이선에게 접근했고, 둘은 남매다. 그러나 셰리는 네이선에게 품은 마음이 진심이었다고 말하고, 사이먼이 사람을 죽인 것에 분노한다. 부두에서의 마지막 대결에서 네이선은 팔이 부러진 채 아드레날린 주사를 스스로 꽂고 일어나, 피부 밖으로 나온 자기 팔뼈로 사이먼을 찌른다. 그는 병원에서 깨어나 가택연금 여섯 달과 보호관찰 다섯 해를 선고받고, 일 년 뒤 교도소 면회실에서 셰리와 만난다. 상영 시간은 110분이다.
반론
이 영화를 싫어할 사람의 논리를 먼저 쓴다. 성실하게 쓰려 한다. 내가 이 논리들을 약하게 만들어 놓고 이기고 싶지는 않다.
첫째, 영화는 자기가 세운 규칙을 자기가 깬다. 초반 이십 분은 통증을 못 느낀다는 것이 초능력이 아니라고 가르치는 데 쓰인다. 부드러운 음식, 세 시간 알람, 짧은 기대수명. 통증은 몸이 보내는 경보이고 경보가 없는 몸은 더 쉽게 망가진다는 것을 영화가 먼저 말한다. 그런데 중반부터 네이선은 끓는 기름에 손을 넣어 총을 집고, 팔에서 총알을 직접 빼내고, 손등에 박힌 유리로 상대의 눈을 찌르고, 허벅지를 관통한 화살로 상대의 목을 꿴다. 뇌진탕과 실혈과 골절이 쌓이는데도 그는 서 있다. 반론자는 말한다. 통증이 없다고 피가 없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영화는 장애를 설정으로 빌려 왔을 뿐, 그 설정의 결과를 끝까지 책임지지 않는다.
둘째, 농담이 하나다. 아프지 않으니 몸이 무기가 된다는 것. 튀김기 장면이 그 농담의 첫 발화이고, 그 뒤의 모든 장면은 같은 농담의 변주다. 처음에는 웃고 두 번째는 놀라고 세 번째부터는 다음 변주를 기다리게 된다. 그리고 후반, 구급차와 부두로 이어지는 마지막 삼십 분은 농담이 빠지고 총격만 남는다. 앞에서 쌓은 유머와 온기가 거기서 식는다는 지적이 여러 평에서 나왔고, 나는 그 지적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셋째, 셰리의 반전이 감정의 바닥을 뺀다. 관객은 한 시간 동안 네이선이 구하려는 사람을 함께 걱정했는데, 그 사람이 처음부터 공범이었다고 하면 앞의 한 시간이 소급해서 가벼워진다. 더구나 그 뒤로도 셰리는 대부분 묶여 있거나 끌려다닌다. 영화가 그녀에게 준 유일한 큰 장면이 배신의 고백이라면, 그 인물은 장치에 가깝다.
변호
받아들일 것부터 받아들인다. 둘째 반론의 후반부 지적은 맞다. 마지막 삼십 분은 길고, 그 길이만큼 영화는 자기 장점을 잃는다. 셋째 반론 가운데 셰리가 오래 묶여 있다는 사실도 맞다. 이 두 가지는 변호하지 않겠다.
반박할 것은 첫째 반론이다. 영화가 규칙을 깬다는 주장은 영화가 어디서 끝나는지를 보지 않은 주장이다. 네이선은 마지막에 팔이 부러지고, 뼈가 피부 밖으로 나오고, 아드레날린 주사 없이는 일어서지 못한다. 그리고 사이먼을 찌른 직후 의식을 잃고 병원에서 깨어난다. 정확히 말하면 영화는 청구서를 안 보낸 것이 아니라 결제를 미뤘다. 통증이 없다는 것이 손상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는 초반의 경고는 마지막 장면에서 그의 팔로 지불된다. 그가 쓰는 무기도 통증의 부재가 아니다. 망설임의 부재다. 끓는 기름에 손을 넣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 않을 뿐이다. 네이선이 하는 것은 보통 사람이 몸이 먼저 거부해서 못 하는 선택을 머리로 하는 일이고, 그래서 그의 액션은 서툴고 뻣뻣하고 효율이 나쁘다. 특수부대 출신 강도를 상대하는 은행원의 몸이 그보다 유려했다면 그쪽이 거짓이었을 것이다.
둘째 반론에는 절반만 답한다. 농담이 하나라는 말은 맞지만, 하나의 농담이 반복되는 것과 상승하는 것은 다르다. 영화는 커피에 손을 데는 일상적 통증에서 시작해 뼈가 드러나는 고문까지 강도를 단계별로 올린다. 한 평은 이 구조를 게임의 초보 과정에서 시작해 난이도를 올리는 설계에 비유했다. 타투숍에서 고문을 당하면서 그가 아픈 척 연기하는 장면은 그 상승 안에서만 웃긴다. 아프지 않은 남자가 아픈 흉내를 내는 것은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그가 거짓말을 하는 순간이고, 그 거짓말이 살려 준다. 변주라고 불러도 좋다. 다만 같은 자리를 도는 변주는 아니다.
셋째 반론에 대한 답은 두 갈래다. 반전이 바닥을 뺀다는 주장은, 영화가 그 바닥을 미리 깔아 두었음을 지나친다. 첫 밤에 셰리는 다들 무언가를 숨기고 살지만 그걸 보여 줄 수 있는 사람을 찾는다고 말하고, 자기 몸의 흉터를 그에게 보여 준다. 그녀가 숨긴 것이 하나 더 있었다는 반전은 그 대사의 연장이지 배반이 아니다. 그리고 반전 이후의 셰리를 보아야 한다. 그녀는 사이먼이 지점장과 경찰을 죽인 것에 화를 내고, 지친 네이선을 차로 깔아 죽이려는 사이먼을 때리며 자기를 죽여 보라고 대든다. 묶여 있는 사람이 하는 행동이 아니다. 영화는 그녀에게 액션을 주지 않았지만 선택은 주었다. 그 선택이 그녀를 장치에서 인물로 돌려놓는다. 다만 그 분량이 적다는 것은 인정한다.
그래도 남는 것을 적는다.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면, 이 영화의 긴장은 주인공이 다칠까가 아니라 주인공이 다친 것을 언제 알게 될까에서 온다. 관객은 그보다 먼저 그의 몸을 본다. 손이 익었고, 팔에 구멍이 났고, 뼈가 나왔다. 그는 모르고 우리는 안다. 이 비대칭이 영화 내내 유지되고, 바로 그 비대칭이 웃음과 걱정을 한 장면 안에 넣는다. 다른 액션 영화가 주인공의 고통을 보여 주어 관객을 아프게 한다면, 이 영화는 주인공의 무감각을 보여 주어 관객을 아프게 한다. 방법이 하나 더 있었던 것이다.
마지막 장면. 일 년 뒤 교도소 면회실에서 네이선은 셰리와 마주 앉아 체리파이를 먹는다. 첫 밤에 그녀가 혀를 씹을 일은 없다고 안심시키며 먹게 해 준 그 파이다. 그는 여전히 아프지 않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프지 않아서 먹는 것이 아니라, 다칠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먹는다. 영화가 110분 동안 하려던 말은 이 한 입에 들어 있고, 그 말은 거창하지 않다. 위험을 감수할 만한 것이 있다는 것. 나는 이 결말을 더 큰 말로 포장하고 싶지 않다. 파이 한 조각이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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