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2025

노보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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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기는 동안 피를 흘리겠다는 약속

삐딱하게보기· 2026. 10. 25.· 2,411자

결론부터 말한다. 「노보케인」은 액션 코미디가 관객과 맺는 약속을 전반부에 꼼꼼히 지키고, 후반부에 두 번 어긴다. 그리고 나는 어긴 쪽을 편든다.

약속

모름지기 액션 코미디란 관객에게 두 가지를 동시에 주겠다는 계약이다. 하나는 주인공의 몸이 망가지는 것을 보며 조마조마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망가짐을 보며 웃는 것이다. 고통은 무겁고 웃음은 가볍다. 무게가 다른 둘을 같은 장면 안에 넣는 일이 이 장르의 기술이며, 그 기술이 통할 때 관객은 손으로 눈을 가린 채로 웃는다. 여기에 조항이 하나 더 붙는다. 구출의 약속이다. 끌려간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은 구할 가치가 있으며, 주인공이 피를 흘리는 이유는 오직 그 사람이다.

이 영화는 그 계약서의 첫 줄을 아주 이상하게 쓴다. 주인공 네이선 케인은 태어날 때부터 통증을 느끼지 못한다. 조마조마함의 절반은 주인공이 아파하는 얼굴에서 오는데, 그 얼굴을 계약서에서 지워 버린 것이다. 무모한 서명이다. 영화가 시작하고 몇 분 안에 그는 뜨거운 커피를 손에 쏟고도 알아채지 못한다. 관객은 그 손을 보며 이 영화가 어떤 식으로 약속을 지킬 생각인지 짐작하게 된다.

노보케인 스틸컷

이행

그런데 지킨다. 방법은 단순하다. 주인공이 아파하지 않으니 몸이 대신 말하게 한다. 함정이 깔린 집 장면을 보자. 강도 일당 중 한 명의 집인데, 들어서는 걸음마다 화살이 다리에 박히고, 그는 거꾸로 매달린다. 보통의 액션 영화라면 여기서 주인공의 비명과 일그러진 얼굴이 긴장을 맡는다. 이 영화는 그 자리에 투덜거림을 넣는다. 다리에 화살이 꽂힌 남자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불평하는 것을 보며, 관객은 화살을 보고 몸을 움츠리고 입을 보고 웃는다. 두 반응이 한 화면 안에서 갈라진다. 이걸 어떻게 만들었나. 피와 웃음을 한 컷 안에 저 간격으로 붙여 놓는 손이 부럽다.

구급차 장면은 액션 쪽 약속을 지킨다. 강도단의 우두머리 사이먼이 네이선을 인질로 잡고 구급차를 몰아 달아나고, 달리는 차 안에서 두 사람이 엉켜 싸우다가 차가 사고를 낸다. 여기에는 농담이 거의 없다. 대신 좁은 공간, 달리는 속도, 밀폐된 차 안이라는 액션 영화의 오래된 재료가 다 들어 있다. 앞에서 실컷 웃겨 놓고 마지막에 와서 정색하는 것은 이 장르의 흔한 수순이고, 영화는 그 수순을 성실히 밟는다. 어느 쪽도 빼먹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성실한 계약 당사자다.

은행 강도 장면도 짚어 둔다. 산타 복장을 한 셋이 들어와 금고 번호를 요구하고 지점장을 쏜다. 여기엔 웃음이 없다. 그 대신 바로 다음부터 네이선이 혼자 그들을 쫓기 시작하면서 액션 영화의 시계가 돌기 시작한다. 경찰은 그를 돕기는커녕 의심하고, 그는 식당 주방과 타투숍을 거쳐 몸으로 길을 뚫는다. 여기까지는 약속의 이행이다.

노보케인 포스터

배반

약속을 어기는 자리는 둘이다.

첫째, 형사 콜트레인. 이 영화의 웃음 가운데 적지 않은 몫은 네이선을 쫓는 두 형사, 민시와 콜트레인의 말장단에서 나온다. 특히 콜트레인은 대사의 박자로 웃기는 인물이다. 액션 코미디에는 명문화되지 않은 조항이 하나 있다. 웃기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그런데 정비소에서의 총격에서 사이먼이 콜트레인을 쏘고, 민시도 총에 맞는다. 웃기던 입이 닫히는 순간 영화의 온도가 바뀐다. 이 지점을 두고 후반부가 앞의 유머를 잃었다는 평이 적지 않다. 나는 반대로 본다. 그 입이 닫혔기 때문에 마지막 삼십 분의 정색이 거짓이 아니게 된다. 농담을 유지한 채로 사람이 쓰러지는 영화보다, 사람이 쓰러지자 농담을 멈추는 영화가 더 정직하다.

둘째, 구출의 약속. 네이선이 피를 흘리는 이유는 셰리였다. 그런데 정비소에서 밝혀진다. 셰리는 사이먼의 여동생이고, 금고 번호를 얻으려고 네이선에게 접근한 공범이었다. 구해야 할 사람이 애초에 납치된 사람이 아니었다면, 그때까지의 추격은 무엇이었나. 장르의 계약으로 보면 이것은 명백한 위약이다. 그런데 영화는 위약 뒤에 한 수를 더 둔다. 셰리가 네이선을 묶은 수갑을 풀어 주고, 달아나는 구급차를 뒤쫓는다. 구출당하던 사람이 구출하러 간다. 구출 서사를 어긴 자리에 구출 서사를 거꾸로 세운 것이다. 고백하건대 나는 이 역전이 반전 자체보다 좋았다. 반전은 누구나 쓸 수 있지만, 반전 뒤에 인물에게 다시 할 일을 주는 것은 아무나 하지 않는다.

상상컨대 각본을 쓴 사람은 「아프지 않은 주인공」이라는 한 줄을 적어 놓고, 그 한 줄이 장르의 약속 가운데 무엇을 망가뜨리는지 목록을 만든 다음, 망가진 자리마다 다른 것을 끼워 넣었을 것이다. 비명 자리에 투덜거림을, 구출 자리에 역전을. 이것은 내 상상이고, 확인한 사실이 아니다. 다만 결과물을 보면 그런 손이 있었다고 믿고 싶어진다. 나라면 못 했다.

편들다가 인정할 것은 인정한다. 정체를 드러낸 뒤의 셰리에게 영화가 내준 시간은 짧고, 그 짧음은 어떤 역전으로도 다 메워지지 않는다.

약속은 지키라고 있는 것이지만, 잘 어긴 약속은 지킨 약속보다 오래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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