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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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개를 훔치는 이야기
절반이 사라지고 오 년이 지난 세계에서 시작합니다. 와칸다에서 싸운 쪽과 타이탄에서 싸운 쪽이 뿔뿔이 흩어진 채로요. 남은 사람들은 각자 다른 방식으로 그 오 년을 통과했고, 지구에 남은 쪽은 마지막에 끊긴 신호 앞에 모여 응답을 기다립니다. 그러다 한 사람이 돌아오면서 이야기가 움직이기 시작하죠.
2019년에 나온 영화를 2026년 9월 23일에 다시 건 판본입니다. 안소니 루소와 조 루소가 연출했고요. 원래 181분이던 영화에 사 분가량이 붙었습니다. 12월에 나올 다음 편과 이어지는 영상이라고 배급사는 설명하더군요. 본편의 밝기와 색을 다시 잡았다는 이야기도 함께 나왔습니다.

이런 설정은 대개 두 가지 길로 빠집니다. 하나는 과거를 고쳐 현재를 바꾸는 길이에요. 주인공이 분기점을 찾아내고, 거기서 한 번 더 울리는 구조죠. 다른 하나는 역설을 피하느라 두 시간 내내 규칙만 설명하다 끝나는 길입니다. 이 영화는 둘 다 피하고 세 번째 길로 갑니다. 시간여행물이 아니라 강탈물로 찍는 겁니다.
그래서 규칙을 맨 앞에 깔아 둬요. 배너는 과거를 바꿔도 현재는 바뀌지 않는다고 못을 박습니다. 과거는 시간여행자에게 그저 새로운 미래일 뿐이라는 쪽이죠. 물리학자 데이비드 도이치가 할아버지 역설에 내놓은 답과 같은 계열입니다. 할아버지를 죽이면 그가 죽는 우주가 따로 생기니 모순이 아니라는 설명이요. 규칙을 세운 다음에야 작전이 시작됩니다.
이 순서가 생각보다 중요합니다. 규칙을 뒤에 설명하는 영화는 관객이 중간에 혼자 계산을 하게 만들거든요. 계산을 시작한 관객은 더 이상 화면을 안 봅니다. 이 영화는 그 계산을 초반에 끝내 놓고, 남은 시간 동안 물건을 훔치는 데만 씁니다. 영리한 배분이죠.
중반부터는 강탈물의 문법 그대로 갑니다. 목표는 여섯 개. 팀을 나누고, 시대를 나누고, 각자 가져옵니다. 2012년의 뉴욕이 있고, 1970년의 군 기지가 있고, 그 밖에 몇 군데가 더 있어요. 훔칠 물건이 여섯 개인데 한 팀으로 다 돌 수는 없으니 당연한 배치입니다.
강탈물을 좀 보신 분들은 이 영화가 그 관습을 얼마나 고분고분 따르는지 금방 알아보실 겁니다. 흩어진 사람들을 한 명씩 찾아가 데려오고, 큰 지도를 펴 놓고 역할을 나누고, 장비를 맞춰 입고, 그러고도 한 번은 반드시 어긋납니다. 순서까지 교과서대로예요. 다른 점이 있다면 훔칠 장소가 공간이 아니라 시간이라는 것 하나죠.
그런데 이 강탈극에는 희한한 조건이 하나 더 붙어 있습니다. 훔친 것을 제자리에 돌려놓아야 한다는 조건이요. 가져온 물건을 쓰고 끝내는 게 아니라, 각각이 있던 시점으로 하나씩 반납하는 일이 뒤에 남습니다. 강탈물에서 반납 장면을 본 기억이 별로 없어요. 훔치는 이야기가 아니라 잠시 빌리는 이야기였던 셈이고, 이 설정이 마지막 십 분의 모양을 결정합니다.
강탈물에서 제일 재미있는 건 계획이 어긋나는 대목인데, 이 영화도 거기서 가장 활기가 돕니다. 2012년 뉴욕에서는 과거의 자기 자신과 붙어서 싸워야 하고요. 손에 쥔 물건을 떨어뜨리는 바람에 엉뚱한 사람이 주워 달아나기도 합니다. 계획이 깨진 자리에서 인물들이 급하게 머리를 쓰는 장면이 이 영화에서 가장 사람 냄새가 나는 대목이에요.
조용한 쪽도 하나 있습니다. 1970년의 군 기지로 간 대목이요. 물건을 챙기러 간 자리에서 토니 스타크는 젊은 시절의 아버지와 마주치고, 처음으로 고맙다는 말을 하고 돌아옵니다. 강탈극 한가운데에 이런 장면을 끼워 넣은 건 꽤 과감한 선택이죠. 작전이 아니라 사람 쪽에 잠깐 발을 들여놓는 대목이고, 다행히 길게 끌지 않습니다.
다만 이 소재로 할 수 있었던 건 더 있었다고 봅니다. 절반이 사라진 세계에서 집과 자리와 직장이 어떻게 재배치되는가, 그게 원래 이런 설정의 몫이거든요. 빈 아파트는 누가 쓰고, 두 사람 몫이던 일은 한 사람이 어떻게 하는지 같은 것들이요. 영화는 그 질문을 도입부 십여 분에 몰아 놓고 작전으로 넘어갑니다. 아깝긴 합니다. 그 십여 분이 꽤 정확해서 더 아까워요.
통하는 쪽은 배너입니다. 십팔 개월 동안 실험해서 헐크와 자기를 하나로 합쳐 놓은 상태로 나와요. 안경을 쓰고 카디건을 입은 채 식당에서 사람들과 사진을 찍어 주고 있습니다. 그 과정을 보여 주지 않고 결과만 꺼내 놓은 다음 바뀐 채로 그냥 굴립니다. 이런 과감한 생략은 이 규모의 영화에서 보기 드물죠.

걸리는 쪽은 설명의 양입니다. 규칙을 앞에 깔아 둔 영화가 그 규칙을 자꾸 다시 말해 줘요. 인물들이 서로에게 이미 아는 것을 설명하는 장면이 여러 번 나옵니다. 세 시간이 넘는 영화에서 이런 중복은 생각보다 비쌉니다. 삼 분쯤은 줄일 수 있었다고 봅니다.
배우 쪽은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가져갑니다. 싸우는 사람보다 설계하는 사람 쪽을 더 오래 하는데, 그 편이 이 인물에 맞아요. 반대로 이름과 대사가 있는데도 기능 하나만 하고 퇴장하는 인물이 적지 않습니다. 포스터에 얼굴이 수십 개 박혀 있는 영화의 숙명이긴 하죠. 다만 숙명이라고 해서 안 보이는 건 아닙니다.
마지막 전투는 세 시간을 끌고 온 보람이 있는 쪽입니다. 사라졌던 사람들이 한꺼번에 돌아와 한 줄로 서는 대목이요. 새로울 건 하나도 없습니다. 다만 계산된 자리에 계산된 것이 정확하게 놓입니다. 이런 장면은 새로워서 통하는 게 아니라 정확해서 통하는 거죠.
덧붙은 사 분은 거의 끝에 몰려 있습니다. 연장된 장면 하나와 쿠키 영상 셋, 그러니까 넷으로 나뉘어 붙었어요. 끝난 이야기 뒤에 다음 이야기로 가는 문을 달아 놓은 셈입니다. 그 문이 꽤 큽니다. 다 끝났다고 믿고 칠 년을 보낸 사람에게는 좀 얄궂은 배치이긴 하죠.
이런 덧붙이기는 원래 조심스럽게 다뤄야 하는 일입니다. 완결된 영화에 뒤늦게 문을 내면 그 문 쪽으로 무게가 쏠리거든요. 앞의 세 시간이 뒤의 사 분을 위한 긴 머리말처럼 보일 위험이 있습니다. 다행히 덧붙은 자리가 본편의 흐름을 건드리지 않는 끝쪽이라, 앞은 앞대로 굴러갑니다. 그래도 극장을 나오면서 기억에 남는 쪽이 어디인지는 사람마다 갈릴 것 같아요.
칠 년 만에 다시 보면 구조가 더 잘 보입니다. 상실로 열고, 강탈로 중간을 채우고, 전투로 닫는 단순한 삼단 구성이에요. 단순한 걸 세 시간 넘게 흔들리지 않고 밀고 가는 일이 쉽진 않습니다. 그 정도면 됐죠.
(덧) 러닝타임이 상영관마다 다릅니다. 일반관은 183분이고 아이맥스와 돌비 시네마는 186분이라고 하더군요. 삼 분이 어디서 나는 차이인지는 표를 사기 전에 확인해 두는 편이 낫겠습니다.
(덧) 디즈니가 올해 만든 상영관 인증 규격이 이 영화에 처음 붙었습니다. 이름은 인피니티 비전이고요. 규격 이름을 작품 이름 옆에 붙여 파는 방식은 당분간 더 보게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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