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2017

애덤: 에피소드 3

작품 페이지에서 댓글 반응 보기 →

끊긴 목소리의 자리

붓끝수다· 2026. 10. 27.· 2,996자

한 남자가 말을 하려고 한다. 목소리는 끊기고 갈라져서 말이 되다 만다. 앞에 선 여자는 그의 누이다. 그는 누이를 알아본다. 그리고 이 장면은 9분짜리 영화의 거의 끝에서 몇 초 만에 지나간다.

「애덤: 에피소드 3」은 게임 엔진으로 실시간 렌더링해 만든 단편이다. 죄수들의 의식이 기계 몸으로 옮겨진 세계, 성벽 도시 밖으로 쫓겨난 기계들의 이야기가 앞선 두 편이었다면 이번 편은 그 기계들이 아니라 사람들 쪽을 본다. 가면을 쓴 지친 여자 메리언이 폐허를 헤매다 기술을 버리고 사는 생존자 무리에 닿는다. 무리의 우두머리는 예언자라 불린다. 메리언은 그에게 머물 곳을 청하고, 예언자는 조건을 건다.

이 영화를 두고 가장 많이 하는 말은 예언자 이야기다. 마지막에 그의 옷과 피부가 벗겨지고 팔이 넷 달린 기계가 드러난다. 사람의 몸을 버린 자들을 영혼 없는 것이라 설교하던 사람이 실은 가장 정교한 기계였다는 반전. 나도 그 장면에서 숨을 멈췄다. 그런데 화면을 끄고 나서 남은 사람은 그가 아니었다. 나는 다르게 보았다. 이 영화에서 가장 오래 남는 사람은 반전을 가진 예언자도, 선택을 하는 메리언도 아니다. 제이컵이다.

제이컵은 메리언의 형제다. 한때 사람이었고 지금은 기계 몸 안에 있다. 작품이 그에게 준 것은 장면 하나, 끊긴 목소리, 누이를 알아보는 눈. 그뿐이다. 그가 어떤 죄로 그 몸에 들어갔는지, 어떻게 이 마을 근처까지 왔는지, 메리언과 어떤 사이였는지 영화는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그는 설명 없이 나타나서 설명 없이 사라진다.

작품이 그를 어떻게 쓰는지는 분명하다. 도구다. 예언자는 메리언에게 저 기계를 부수라고 한다. 영혼은 이미 빼앗겼고 기계로 사는 것은 죽음보다 못하니 그것은 자비라는 논리다. 여기서 제이컵은 시험의 재료다. 구원받기 위해 당신은 무엇까지 할 수 있는가, 영화가 내건 그 질문을 재는 저울추다. 저울추는 말이 없어야 한다. 말이 없어야 메리언의 선택이 깨끗한 선택이 된다.

그런데 제이컵은 말을 한다.

그는 멈추라고 하려는 것 같다. 목소리는 부서진 기계 소리로 나온다. 그래도 그는 누이를 안다. 이 한 가지가 예언자의 설교 전체를 뒤집는다. 영혼을 빼앗겼다는 자가 자기 누이의 얼굴을 안다면 영혼은 어디에 있는가. 감독이 이 연작의 뼈대는 영혼이 어디 있느냐에 관한 논의라고 말했다는 글을 읽었다. 그 질문에 가장 정확하게 답하는 사람은 설교단의 예언자가 아니라 바닥의 제이컵이다. 그런데 작품은 그 답을 다 듣기 전에 그를 치운다. 답이 길어지면 시험이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연작의 전제를 한 번 더 적어 둔다. 첫 편의 소개는 이 기계들을 뇌가 지워진 채 기계 껍데기에 갇힌 사람이라고 설명한다. 지워졌다고 했다. 그런데 셋째 편의 제이컵은 누이를 안다. 지워진 것이 아니라 덮인 것이다. 덮인 것은 어떤 순간에 다시 올라온다. 이 연작이 세 편에 걸쳐 조금씩 바꿔 온 말이 바로 이것이고, 그 말을 몸으로 보여 주는 사람이 제이컵이다. 주인공이 아닌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정보를 맡겨 놓고, 작품은 그를 몇 초 안에 부순다.

애덤: 에피소드 3 스틸컷

이야기를 그의 자리에서 돌려 본다. 작품이 보여 주지 않으니 나는 짐작만 할 수 있다. 아마 그도 누군가를 찾아 걸었을 것이다. 아마 누이를 보았을 때 그는 살았다고 느꼈을 것이다. 그러고 나서 누이가 자기를 부수러 온다. 그의 자리에서 이 영화는 구원 이야기가 아니다. 가족에게 버려지는 이야기다. 누이가 가면을 벗고 숨을 쉬게 되는 값이 자기다.

자비라는 말도 그의 자리에서 다시 들어 본다. 예언자는 부수는 일을 자비라고 부른다. 자비는 받는 사람이 있어야 성립하는 말이다. 받는 사람이 그것을 원했는가. 제이컵은 멈추라고 했다. 그렇다면 그 자비는 제이컵을 위한 것이 아니라 메리언을 위한 것이다. 더 정확히는 메리언이 마을에 들어오기 위한 것이다. 자비라는 말이 가리키는 사람과 그 말로 이득을 보는 사람이 다를 때, 그 말은 보통 다른 이름을 갖는다. 작품은 그 이름을 끝까지 입에 올리지 않는다. 대신 마지막에 예언자의 피부를 벗긴다. 그것이 작품의 대답인 셈이다.

그 숨 이야기를 하자. 제이컵을 부순 뒤 메리언은 축복을 받고 가면을 벗는다. 독한 공기를 그냥 들이쉰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작품은 이것을 구원의 증거로 내민다. 이 마을 사람들은 가면을 쓰지 않는다는 말이 참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되묻자. 누가 그 공기를 숨 쉴 수 있게 했는가. 마을 사람들의 믿음인가, 예언자의 손인가. 작품은 답을 마지막 장면에 둔다. 예언자 자신이 기계다. 사람의 몸을 버린 자를 영혼 없다 하는 자가 사람의 몸이 아니다.

흔한 해석은 여기서 거짓 예언자로 끝난다. 그런데 제이컵의 자리에서 보면 더 나쁜 것이 보인다. 똑같이 기계 몸인 둘 중 하나는 설교단에 서고 하나는 부서진다. 차이는 피부다. 흉터처럼 보이게 만든 이음매로 사람 피부를 덮은 쪽은 사람 노릇을 하고, 쇠가 그대로 드러난 쪽은 영혼 없는 것으로 불린다. 안에 무엇이 있느냐가 아니라 겉에 무엇을 둘렀느냐가 누가 사람인지 정한다. 이것은 먼 미래의 폐허 이야기만은 아닐 것이다.

물론 내 읽기도 틀릴 수 있다. 영화는 9분이고 제이컵이 정말 무엇을 기억하는지는 몇 초만 보여 준다. 그가 누이를 알아본 것이 기억인지, 기억의 찌꺼기가 만든 반사인지 나는 가릴 수 없다. 그러나 작품이 그 몇 초를 넣었다는 것, 넣고서 바로 지나갔다는 것, 이 둘은 사실이다. 넣지 않을 수도 있었다. 넣었다면 그 몇 초는 보라고 넣은 것이다.

애덤: 에피소드 3 포스터

이 영화의 자랑은 얼굴이다. 배우의 머리를 1초에 서른 번 스캔해 흘려 넣는 기법으로 사람 얼굴을 사람처럼 만들었다고 제작진은 말한다. 메리언의 얼굴은 과연 정교하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가장 사람 같은 순간은 그 정교한 얼굴이 아니었다. 얼굴 없는 쇠가 더듬거리며 낸, 말이 되다 만 소리였다.

구원받기 위해 당신은 무엇까지 할 수 있는가. 영화가 내건 질문이다. 나는 질문을 바꿔서 들고 나왔다. 누가 구원받는 동안 누가 그 값이 되었는가. 그리고 값이 된 사람은 자기가 값이라는 것을 알았는가. 끊긴 목소리는 거기까지 말하지 못했다.

댓글

0 / 1,000

아직 댓글이 없어요. 첫 댓글을 남겨 주세요

애덤: 에피소드 3의 다른 리뷰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