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2017
애덤: 에피소드 3
작품 페이지에서 댓글 반응 보기 →
머물 곳을 청한 사람과 조건을 건 사람
누군가에게 머물 곳을 부탁해 본 적이 있으신가요. 하룻밤이든 한 달이든, 그 부탁을 꺼내기까지 마음속에서 몇 번을 접었다 폈는지 기억하시는 분이 계실 거예요. 「애덤: 에피소드 3」은 그 부탁으로 시작하는 9분짜리 영화입니다. 가면을 쓴 지친 여자 메리언이 폐허를 걸어 어느 마을에 닿고, 그 마을의 우두머리에게 머물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우두머리는 예언자라 불립니다. 저는 오늘 이 두 분의 관계만 보려고 해요.
먼저 세계를 조금만 설명하겠습니다. 이 연작은 사람의 의식을 기계 몸에 옮기는 세상의 이야기입니다. 앞선 두 편이 그렇게 기계가 된 이들을 따라갔다면, 이번 편은 그 기술을 모두 버리고 사는 사람들의 마을이 무대입니다. 바깥 공기는 독해서 메리언은 가면을 쓰고 다니는데, 이 마을 사람들은 가면을 쓰지 않습니다.
메리언의 자리
이분이 바라는 것은 단순합니다. 쉬고 싶은 거예요. 영화는 이분이 어디서 왔는지, 무엇을 잃고 왔는지 말해 주지 않습니다. 다만 걸음과 눈이 지쳐 있습니다. 머물 곳을 청하는 사람은 대개 그 자리에서 가장 약한 사람입니다. 거절당하면 다시 폐허로 나가야 하니까요. 그래서 이분은 조건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아마 어떤 조건이든 들을 준비가 되어 있었을 거예요.
가면 이야기를 조금 하고 싶어요. 이분은 바깥에서 줄곧 가면을 쓰고 걸어왔습니다. 가면은 숨을 지켜 주지만, 쓰고 있는 동안은 얼굴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누구도 이분의 표정을 보지 못하고, 이분도 마음껏 숨을 쉬지 못합니다. 그러니 머물 곳을 청한다는 말 속에는 아마 가면을 벗고 싶다는 말이 함께 들어 있었을 거예요. 몸을 누일 자리와 얼굴을 내놓을 자리. 이분이 바란 것은 둘 다였을 겁니다.
예언자가 내건 조건은 한 기계를 부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계는 한때 사람이었던 이분의 형제 제이컵입니다. 영혼은 이미 빼앗겼으니 기계로 사는 것은 죽음보다 못하다, 그러니 그것은 자비라는 설명이 따라옵니다. 메리언은 그 말을 받아들입니다. 부서지기 직전 제이컵이 끊긴 목소리로 누이를 알아보는데도요. 저는 이 선택을 두둔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그 자리에 서 보면, 이분이 믿은 것은 예언자의 말이 아니라 쉬고 싶다는 자기 마음이었을 거라고 짐작합니다. 마음이 너무 지치면 무엇이 자비인지 스스로 가리기 어려워집니다.
예언자의 자리
이분을 읽는 일은 조심스럽습니다. 영화가 끝날 때 이분의 옷과 피부가 벗겨지고 안에서 팔이 넷 달린 기계가 드러나기 때문이에요. 사람의 몸을 버린 이들을 영혼 없는 것이라 가르치던 분이 사람의 몸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분이 메리언에게 한 말은 전부 거짓이었을까요.
저는 그렇게만 보지는 않아요. 이분이 바라는 것은 자기 마을이 지켜지는 것으로 보입니다. 기술을 버린 사람들을 이끌고, 가면 없이 숨 쉬게 하고, 바깥에서 온 사람에게는 시험을 치르게 합니다. 시험은 이 마을에 속하겠다는 약속을 받아 내는 방식이었을 거예요. 아마 이분에게 메리언은 한 사람이 아니라 마을의 안전 문제였을 겁니다. 그런데요, 이유가 있다고 해서 그 행동이 괜찮아지는 건 아닙니다. 지친 사람에게 가장 아픈 것을 값으로 부르고, 그것을 구원이라 이름 붙이는 일은 이유가 무엇이든 그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지 않은 것입니다.
둘 사이
두 분이 함께 있는 장면은 셋입니다. 메리언이 머물 곳을 청하는 장면, 예언자가 조건을 거는 장면, 그리고 조건을 치른 메리언이 축복을 받고 가면을 벗어 독한 공기를 그냥 들이쉬는 장면. 마지막 장면에서 이분은 아무 탈 없이 숨을 쉽니다. 약속은 지켜진 셈이에요.
그런데 두 분의 말은 처음부터 엇갈려 있었습니다. 메리언은 머물 곳을 달라고 했고, 예언자는 구원을 주겠다고 했어요. 머물 곳은 몸이 쉬는 자리이고, 구원은 그 사람의 전부를 바꾸는 말입니다. 한 사람은 작은 것을 청했고 다른 사람은 큰 것으로 답했습니다. 큰 것으로 답하는 사람은 대개 큰 값을 부릅니다. 메리언이 치른 값이 그것이었어요.
듣고 싶었던 말도 달랐을 거예요. 메리언이 듣고 싶었던 말은 아마 들어오라는 한마디였을 겁니다. 들은 말은 먼저 이것을 하라는 조건이었어요. 예언자가 듣고 싶었던 말은 따르겠다는 대답이었고, 실제로 그 대답을 들었습니다. 한 사람만 원하는 것을 들은 관계는 오래가지 않거나, 오래가더라도 한쪽이 계속 값을 치르게 됩니다.
관계가 바뀐 장면은 없습니다. 바뀌지 않은 이유는 두 분 사이에 힘이 처음부터 한쪽에만 있었기 때문이에요. 청하는 사람과 조건을 거는 사람. 영화는 마지막에 예언자의 피부를 벗겨 보여 주지만, 그렇다고 두 분의 자리가 바뀌지는 않습니다. 조건을 건 사람은 끝까지 조건을 건 사람으로 남아요. 그 안이 쇠였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보는 우리뿐입니다.
우리 주변에도 이런 관계가 있습니다. 힘들 때 찾아간 사람이 쉬게 해 주는 대신 먼저 무언가를 내려놓으라고 할 때가 있어요. 그 사람과 연을 끊어라, 그 일을 그만둬라, 그러면 네가 편해진다. 그 말이 전부 틀린 것은 아닐 거예요. 다만 지쳐서 찾아간 사람에게 가장 먼저 값을 묻는 자리라면, 거기가 쉴 곳인지는 한 번 더 보셔도 됩니다. 쉴 곳은 보통 먼저 앉히고 나서 묻습니다.
메리언에게 누가 먼저 앉으라고 했더라면 이 영화는 다른 영화가 되었을 거예요. 저는 그렇게 믿어요.
덧붙입니다. 영화는 9분이고, 메리언과 제이컵이 어떤 남매였는지, 예언자가 왜 그 마을을 지키는지는 보여 주지 않습니다. 위에서 짐작이라고 적은 부분은 전부 제 짐작입니다. 작품에 없는 과거를 두 분에게 붙이지 않으려고 했어요.
댓글
아직 댓글이 없어요. 첫 댓글을 남겨 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