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2017
애덤: 에피소드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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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 3만 5천 장으로 지은 마을
3만 5천 장. 이 연작의 땅을 만들기 위해 제작진이 찍은 사진의 수다. 캘리포니아의 한 광산에서 흙과 바위와 버려진 물건을 사진으로 찍어 그대로 입체로 옮겼다. 그러니까 「애덤: 에피소드 3」의 폐허는 그려진 폐허가 아니라 찍힌 폐허다. 9분짜리 영화의 바닥에 그만큼의 사진이 깔려 있다.
이 글은 이 영화를 그 영화가 만들어진 해에 놓고 본다. 2017년, 그리고 그로부터 아홉 해가 지난 지금.
그때
2017년 가을, 한 영화감독이 그해 세운 작은 스튜디오가 짧은 영화들을 유튜브와 게임 판매 사이트에 올리고 있었다. 긴 영화로 키울 만한 이야기가 무엇인지 보는 사람의 반응으로 가늠하겠다는 것이 그 스튜디오의 방식이었다. 「애덤」 연작의 두 번째와 세 번째 편은 그 실험의 한 갈래였다. 스물다섯 명이 여섯 달 동안 두 편을 잇달아 만들었고, 세 번째 편은 그해 11월 30일 게임 엔진 회사의 유튜브 채널에 올라왔다.
그해 그 스튜디오가 올린 짧은 영화는 열 편이다. 6월 중순에 첫 편이 올라왔고, 6월에 둘, 7월에 둘, 8월에 하나, 10월에 「애덤」 두 번째 편, 11월에 세 편이 더 올라왔다. 몇 주에 한 편꼴이다. 극장 개봉과 다른 속도이고, 텔레비전 편성과도 다른 속도다. 보는 사람 쪽에서 말하면 이 영화는 공짜였고, 아무 때나 볼 수 있었고, 아홉 분이었다. 2017년의 유튜브가 영화에 허락한 자리가 딱 그만큼이었다.
그때 이 영화의 쓸모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이야기, 다른 하나는 증명. 게임을 만드는 엔진으로 영화를 실시간으로 그릴 수 있다는 증명이다. 컴퓨터로 만든 영화의 한 장면은 보통 그려 놓고 기다려야 한다. 실시간이라는 말은 기다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감독은 그해 인터뷰에서 현장에서 찍는 것보다 훨씬 편하고, 재촬영 없이 장면을 바꿀 수 있어 이런 영화라면 더 싸게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다음 편의 가장 큰 고비는 사람 얼굴이라고 했다. 배우의 연기를 컴퓨터 얼굴에 실시간으로 옮기는 일.
그래서 이 영화는 얼굴로 시작한다. 가면을 쓴 여자 메리언이 폐허를 걸어 기술을 버리고 사는 사람들의 마을에 닿는다. 가면 위로 보이는 것은 눈뿐이고, 가면을 벗는 순간이 이 영화의 가장 큰 사건이 된다. 제작진은 배우의 머리를 1초에 서른 번 스캔해 흘려 넣는 방식으로 그 얼굴을 만들었다고 밝혔다. 2017년의 숙제가 그대로 장면이 된 것이다.
공간으로 보면 이 마을은 이상한 곳이다. 세계는 사람의 의식을 기계 몸에 옮기는 기술로 돌아가는데, 이 마을은 그 기술을 모두 버렸다. 바깥 공기가 독한데도 가면을 쓰지 않는다. 그런데 그 마을을 그린 도구는 그해 가장 새로운 기술이다. 광산의 흙을 사진으로 떠서 만든 땅 위에, 피부 아래로 빛이 번지는 것까지 계산한 얼굴을 세우고, 기술을 버리라는 설교를 시킨다. 영화 안의 말과 영화 밖의 손이 반대 방향을 가리킨다.
지금
아홉 해가 지나서 보면 세 가지가 달리 보인다.
첫째, 이 영화는 예고편이었다. 유튜브에 올려 반응을 보고 긴 영화로 키우겠다는 계획의 일부였고, 감독은 더 큰 「애덤」 영화의 밑그림을 써 두었다고 했다. 내가 확인한 범위에서 그 긴 영화의 소식은 찾지 못했다. 그러니 지금 이 9분은 긴 이야기의 입구가 아니라 그 자체로 끝이다. 예언자의 옷과 피부가 벗겨지고 팔 넷 달린 기계가 드러나는 마지막 장면은 그때는 다음 편을 기다리게 하는 문이었고, 지금은 닫힌 문이다. 이상하게도 닫힌 문 쪽이 더 무섭다.
그 속도의 흔적이 영화 안에도 남아 있다. 마을 사람들이 누구인지, 예언자가 어디서 왔는지, 메리언의 형제가 어떻게 기계가 되었는지 영화는 설명하지 않는다. 설명은 다음 편의 몫이었고, 다음 편은 보는 사람의 반응이 정할 일이었다. 지금 보면 그 빈자리가 결함처럼 보이기도 하고, 아홉 분짜리 영화가 가질 수 있는 가장 정직한 모양처럼 보이기도 한다. 나는 후자 쪽으로 기운다. 다 설명하지 않는 폐허가 다 설명한 폐허보다 넓다.
둘째, 증명의 무게가 가벼워졌다. 2017년에는 이 그림이 실시간으로 나온다는 것 자체가 뉴스였다. 지금 보는 사람은 그 뉴스를 모른 채 본다. 그러면 남는 것은 이야기뿐이다. 거처를 구하러 온 여자에게 예언자가 내건 조건, 한때 사람이었던 기계를 부수라는 요구, 부서지기 직전에 그 기계가 누이를 알아보는 순간, 그리고 가면을 벗고 독한 공기를 들이쉬는 축복. 기술을 빼고 봐도 이 뼈대는 선다. 아마 그것이 세계를 보여 주는 데 그친 앞선 두 편과 이 편의 차이일 것이다. 이 편은 하나의 이야기를 끝까지 간다.
셋째, 마을의 설교가 다르게 들린다. 왜 기술을 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가장 새로운 기술로 만들었을까? 2017년의 답은 간단했다. 그것이 보여 줄 수 있는 것이었으니까. 지금의 답은 절반만 그렇다. 기계 몸을 영혼 없는 것이라 부르던 예언자가 기계였다는 결말은, 기술을 버리자는 말이 어디서 나오는지 보라는 말로도 읽힌다. 일상에서도 그렇다. 손글씨를 권하는 글은 대개 화면으로 읽고, 느리게 살자는 말은 빠른 통신망을 타고 오고,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광고는 가장 정교한 카메라로 찍힌다. 말과 손이 반대를 가리키는 것은 이 마을만이 아니다.
다만 이 읽기는 절반만 맞다. 영화는 예언자가 왜 그런 설교를 하는지 말하지 않는다. 속이려는 것인지, 자기도 믿는 것인지, 더 큰 계획의 일부인지 9분 안에는 답이 없다. 닫힌 문 뒤에 있던 것을 나는 모른다.
그래서 볼까 말까를 묻는다면 이렇게 답하겠다. 2017년의 뉴스로 보지 말고, 흙 3만 5천 장 위에 세운 9분짜리 이야기로 보라. 땅은 진짜 땅을 찍은 것이고, 얼굴은 진짜 얼굴을 떠낸 것이고, 그 위에서 벌어지는 일만 지어낸 것이다. 어느 쪽이 더 사실 같은지는 보고 나서 정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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