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능 · 2026
연애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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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서 십 초인데 데려다준다
걸어서 십 초다. 같이 사는 집에서 여자친구의 네일숍까지. 남자는 그 십 초를 데려다준다. 아홉 번째 회의 남자다. 집 안에서도 여자친구가 눈앞에 없으면 찾아다닌다고 했다. 십 초를 같이 걷는 사랑이 있다. 십 초를 못 떨어지는 사랑도 있다. 같은 십 초다.
이 프로그램은 헤어지기 직전의 커플을 스튜디오에 앉힌다. 두 사람이 자기들이 찍힌 영상을 본다. 진행자 셋이 남자 쪽과 여자 쪽으로 갈라서서 대신 협상한다. 끝에 두 사람이 각자 고른다. 만난다, 헤어진다. 6월에 시작해 스무 번을 하고 끝난다고 했다. 아직 두 번이 남았다. 나는 그중에서 받아 적은 순간들을 늘어놓는다. 순서는 받아 적은 순서다.
뭐든 지나치면 병
아홉 번째 회. 진행자가 십 초 남자에게 한 말이다. 그날 협상 조건에 이런 게 있었다. 일하는 동안 찾아오지 말기. 남자 사람 친구와 술 약속 잡지 않기. 남자가 받았고 여자가 받았다. 사랑이 조건이 되는 순간이 있다. 여기서는 그게 출근길이었다. 두 사람은 계속 만난다.
여덟 번째 회에는 7년 된 연극배우 커플이 나왔다. 남자는 서른둘이고 통장에 백만 원이 안 남았다. 그런데 크로스핏 대회 때문에 공연 일정을 안 잡은 적이 있다. 하루에 네 시간쯤 운동한다. 여자는 극단을 운영하고, 연출을 하고, 영어 뮤지컬 학원에서 가르친다. 자기 이름으로 집도 마련했다. 남자가 영상 편집으로 번 돈을 동아리에 기부했다는 얘기가 나왔다. 남을 돕는 건 좋은 일이다. 통장에 백만 원이 없는 사람이 하면 다른 일이 된다. 진행자는 남을 돕는 것보다 자기 미래를 먼저 준비하라고 했다. 두 사람은 계속 만나기로 했다. 여자가 집을 한 채 더 사게 될지는 모른다.
열세 번째 회. 여자가 제주도 여행을 가려고 숙소와 맛집 협찬을 이백만 원어치 구했다. 남자가 낼 몫은 비행기와 렌트비 오십만 원이었다. 여행은 취소됐다. 오십만 원이 없어서 이백만 원이 날아갔다. 산수는 맞는데 셈이 안 맞는 일이 세상에 있다. 남자는 모아 둔 돈이 영 원이고 빚이 있다고 했다. 데이트 비용은 거의 여자가 냈다.
데이트를 협찬으로만 한다? 왜 만나죠?
같은 회에 진행자가 한 말이다. 물음표가 붙어 있는데 질문이 아니었다. 두 사람은 그래도 만나기로 했다. 남자는 말 한마디면 천 냥 빚도 갚는데 왜 따뜻한 말 한마디를 못 해 줬을까, 하고 반성했다. 천 냥이 요즘 돈으로 얼마인지 나는 모른다. 빚이 있다는 건 안다.
열네 번째 회의 남자는 삐에로다. 11년째 만났고 결혼을 준비한다. 성수기엔 한 달에 구백만 원, 비수기엔 영 원. 비가 오면 그날 일정이 사라진다. 남자가 여자에게 말했다. 나 같은 놈이랑 왜 결혼하냐고. 지금도 안 늦었다고, 가도 된다고. 진행자가 되물었다. 떠날 자신도 없으면서 왜 자꾸 상처를 주냐고. 다른 진행자는 그냥 애다, 했다. 둘 다 맞는 말이다. 애가 상처를 준다. 그게 제일 아프다.
열일곱 번째 회. 여자는 만 스물다섯, 남자는 만 스물둘. 둘 다 춤을 춘다. 남자가 먼저 말했다. 너 아니면 결혼할 생각이 없다고. 여자는 그 말로 결혼을 꿈꾸기 시작했다. 남자는 군대에서 나온 지 넉 달 만에 생각을 바꿨다. 진행자가 최소 5년은 결혼 생각을 하지 말라고 했다. 다른 진행자는 헤어지고 싶어서 트집 잡는 거 아니냐고 물었다. 두 사람은 당분간 결혼 얘기를 내려놓고 만나기로 했다. 결혼을 하지 않기로 합의하는 데 스튜디오 하나가 필요했다.
일곱 번째 회는 정치와 종교와 남자 사람 친구로 싸우는 커플이었다. 여자가 설명하려 들면 남자가 입을 닫았다. 진행자가 싸움 자체가 습관이 된 것 같다고 했다. 협상 조건이 재미있다. 여자는 연락과 표현을 더 자주 하라고 했고, 남자는 정치랑 종교 얘기할 때 서로 존중하자고 했다. 한쪽은 양을 요구하고 한쪽은 태도를 요구했다. 거래가 성립했다. 계속 만난다. 다음 선거 때 어떻게 되는지는 방송이 없다.
가장 조용한 순간은 열네 번째 회 뒤쪽에 있다. 가도 된다고 말하던 삐에로가, 실은 풍선 만드는 법과 데빌스틱을 꾸준히 연습하고 있었다는 게 나온다. 카메라 앞에서는 자기를 깎고, 카메라가 없으면 손을 움직인다. 여자는 그 사람을 두고 내게 휴식과 자유를 준 사람이라고 했다. 망설이지 않고 골랐다.
열세 번째 회의 여자는 어느 날부터 남자의 말을 녹음하기 시작했다. 이유가 있었다. 남자가 화를 내기 시작하면 아무 반박도 못 하겠어서, 자기가 제정신일 때 다시 들어 보고 정말 자기가 잘못했는지 확인하려고. 이 문장은 농담이 안 된다. 그래서 그냥 둔다.
총평 한 줄. 스튜디오에 들어온 커플들은 대부분 그대로 나간다. 헤어지러 왔다가 조건을 하나 들고 돌아간다. 일하는 데 찾아오지 않기로, 협찬 없이 밥을 먹기로, 결혼 얘기를 5년 미루기로. 조건은 종이에 적힌다. 십 초는 그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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