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능 · 2026
연애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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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깜한 방에서 먼저 나온 사람에게
편지를 쓰게 된 사정부터 말할게요. 이 프로그램은 헤어지기 직전인 커플이 스튜디오에 직접 나와서, 자기들이 찍힌 영상을 보고, 진행자들이 남자 쪽 여자 쪽으로 편을 갈라 대신 협상을 하고, 맨 끝에 두 사람이 각자 고르는 거예요. 만난다, 헤어진다. 열 번째 회까지 두 사람이 나란히 헤어진다를 고른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그런데 8월의 마지막 월요일에 처음으로 그 일이 일어났고, 저는 거실에서 혼자 좀 이상해졌어요. 그래서 편지예요. 받으실 리 없지만요.
열 번째 회의 남자분께.
안녕하세요. 저는 그냥 텔레비전 앞에 있던 사람이에요. 사귄 지 사십 일이라고 했죠. 사십 일인데 결혼 얘기가 나왔고, 사십 일인데 이별 위기가 벌써 두 번이었다고요. 저는 그 숫자에서부터 호들갑을 떨었어요. (저는 사십 일이면 아직 상대 이름을 저장할 때 성을 붙일지 말지 고민하는 사람이에요. 결혼은커녕요.) 박사 과정에 있는 분이 사십 일을 그렇게 빽빽하게 쓸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어요.
영상에서 당신이 한 일을 세 개만 적어 볼게요. 제가 본 것만요.
하나. 그분이 학생회 친구들이랑 몽골에 갔다 왔고, 거기서 올린 게시글 하나에 당신은 화를 냈어요. 사진에 남자 사람 친구가 있었다고요. 둘. 헬스장에서 만난 다른 친구를 두고도 다퉜고, 스튜디오에서는 그분 주변에 위장 남사친이 수두룩하다고 말했어요. 그분은 공대라 성비가 9 대 1이라고, 오수 끝에 늦게 들어가서 다 나이 차 많이 나는 동생들이라고 설명했는데요. 셋. 그분이 워터밤 얘기를 꺼냈을 때, 당신은 몽골 여행과 남사친 얘기를 처음부터 다시 꺼냈어요. 그때 진행자 한 분이 제발 헤어져 달라고 했죠. 저도 소파에서 같은 말을 했어요. 조금 더 작게요.
솔직히 말하면 거기까지는 화가 났어요. 그분이 당신이 자기 인간관계에 관여하면서 점점 자기 모습을 잃어 가는 것 같다고 했을 때, 저는 그분 편에 완전히 붙어 있었어요. 그런데 진행자가 당신을 두고 한 말이 있었죠.
자기가 만든 깜깜한 방에 갇혀 있는 느낌
그 말에 제가 멈췄어요. 당신은 그분을 가둔 사람이기도 했지만, 그 방에 같이 들어가 앉아 있던 사람이기도 했구나. 다른 진행자는 당신이 가시나무새 같다고 했어요. 남한테만이 아니라 자기한테도 그렇게 엄격한 사람이라고요. 그러고는 아무도 당신이 워터밤에 가는 걸 뭐라고 할 사람 없다고, 꼭 가라고 했어요. 그 장면에서 당신 표정을 저는 오래 봤어요. 화면이 넘어갔는데도요.
제가 묻고 싶은 건 이거예요. 방에서 나올 때 무서웠나요. 영상을 보고 자기 잘못을 알았다고, 그분을 위해서라도 헤어지는 게 맞다고 당신이 말했을 때요. 그분은 더 이상 새장 속의 새로 살고 싶지 않다고 했고요. 두 사람이 같은 답을 골랐는데 이유가 달랐어요. 한 사람은 나가고 싶어서, 한 사람은 보내 주고 싶어서. 저는 이게 이 프로그램에서 본 것 중에 제일 다정한 이별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 다정함은 당신이 먼저 문을 연 데서 왔다고요. 그분은 새장이라고 불렀고 당신은 방이라고 불렸지만, 열쇠를 돌린 건 안쪽에 있던 사람이었어요.
저는 그날 울었어요. 왜 울었는지는 모르겠어요. 남자 사람 친구 문제로 사십 일 만에 헤어지는 커플을 보고 우는 사람이 저밖에 없을 거라는 건 알아요. 아마 당신이 마지막에 상대를 탓하는 말을 한 마디도 안 하고 끝냈기 때문일 거예요. 사십 일 동안 그렇게 많은 말을 했던 사람이, 마지막에는 자기 얘기만 했어요. 내 잘못을 알았다, 그래서 헤어지는 게 맞다. 주어가 전부 당신이었어요.
생각해 보면 당신들은 사십 일 안에 시작과 끝을 다 해 본 사람들이에요. 결혼 얘기를 꺼냈다가, 두 번 헤어질 뻔했다가, 스튜디오까지 왔다가, 같은 날 같은 답을 골랐어요. 보통은 몇 년에 걸쳐 나눠서 겪는 일을 한 계절에 몰아서 겪은 거잖아요. 그래서 그분이 자기 모습을 잃어 가는 것 같다고 말했을 때, 그게 과장으로 안 들렸어요. 사십 일이 그렇게 길 수도 있구나, 했어요.
진행자가 한 말 하나를 더 옮길게요. 본인의 삶까지 부정하면서 억지로 관계를 맞춰 갈 필요는 없다고요. 누구를 보고 한 말인지 화면만으로는 확실하지 않았는데, 저한테는 두 사람 모두에게 한 말로 들렸어요. 그분의 삶도, 당신의 삶도요.
워터밤은 가셨나요. 안 가셨으면 내년에 가세요. 저는 물 맞는 거 싫어해서 안 갈 건데, 당신은 가야 할 것 같아요. 거기서는 아무도 누가 누구 옆에 서 있는지 세지 않을 거예요. 당신도요.
건강하세요. 방 밖은 생각보다 밝아요.
추신. 저는 그 뒤로 남의 게시글 사진에서 옆에 누가 있는지 세는 버릇을 끊어 보려고 해요. 당신 덕분이라고 하면 이상하지만, 사실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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