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2017
신: 세렝게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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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렝게티는 왜 탁자 위에 있을까
세렝게티는 왜 탁자 위에 있을까? 닐 블롬캠프의 오츠 스튜디오가 2017년에 내놓은 4분짜리 단편 「신: 세렝게티」는 아프리카의 초원을 서재 한가운데 놓인 커다란 탁자 위에 올려놓는다. 흔한 답은 이렇다. 신에게 인간은 장난감이고, 탁자는 장난감을 올려놓는 자리라는 것. 절반만 맞다. 나머지 절반은 탁자가 보는 사람의 높이를 정한다는 데 있다. 무엇을 어디에 올려놓느냐가 누가 누구를 내려다보는지를 결정한다. 바닥에 깔았다면 신은 엎드려야 했을 것이다. 벽에 걸었다면 신과 인간은 마주 보았을 것이다. 탁자 위에 두었기 때문에 신은 앉은 채로 내려다본다.
건축에서 높이는 곧 권력이다. 왕의 옥좌가 그렇고, 교실의 교단이 그렇고, 법정의 판사석이 그렇다. 높은 자리의 사람은 내려다보고, 낮은 자리의 사람은 올려다본다. 그런데 내려다보는 자리에도 두 종류가 있다. 옥좌에 앉은 사람은 보이기 위해 앉는다. 감시탑에 앉은 사람은 보기 위해 앉는다. 둘의 차이는 아래쪽에서 위를 볼 수 있느냐에 있다. 옥좌는 올려다보라고 만든 자리이고, 감시탑은 올려다봐도 안이 보이지 않게 만든 자리다.
이 영화의 신은 두 번째 쪽이다. 영화는 코끼리 떼가 초원을 건너는 모습을 새의 높이에서 내려다보며 시작한다. 카메라가 올라가면 그 초원 전체가 나무 벽으로 둘러싸인 서재의 탁자 위에 있다. 탁자 위의 사람들은 머리 위에 신이 있다는 것을 모른다. 그들 눈에는 하늘이 보일 뿐이다. 신은 보지만 보이지 않고, 인간은 보이지만 보지 못한다. 시선이 한 방향으로만 흐르는 구조다. 이 일방의 시선이 영화의 모든 사건을 만든다고 볼 수 있다. 보이지 않는 쪽은 무엇을 해도 책임을 묻는 눈이 없기 때문이다.
서재를 보자. 벽은 짙은 나무 패널이고, 대리석 벽난로가 있고, 책장이 있고, 소파가 둘 있다. 방 한가운데를 거의 다 차지하는 것은 탁자다. 그 위에 초원과 나무, 물웅덩이, 코끼리 떼, 그리고 한쪽 끝의 바위 언덕과 동굴이 있다. 구조만 보면 이 서재는 건축가의 모형실과 닮았다. 모형실에서도 사람들은 탁자를 둘러서서 작은 도시를 내려다본다. 차이는 목적이다. 모형실의 사람들은 아직 짓지 않은 것을 보며 고치려고 모인다. 이 서재의 주인은 이미 지어진 것을 앞에 두고 고치지 않으려고 앉아 있다. 그는 책을 읽는다. 초원은 책 너머에 있다.

이 방에는 두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은 앉아 있고, 한 사람은 서 있다. 가죽 의자에 앉은 쪽이 신이고, 벽난로 앞에 선 쪽이 집사 제프리다. 앉은 사람이 말하고, 선 사람이 움직인다. 인간이 나뭇가지를 비벼 불을 피우자 신은 "내가 해도 된다고 한 적 없다"고 하며 집사에게 불을 끄게 한다. 가뭄이 들어 사람들이 기우제를 지내자 집사에게 물을 주게 한다. 마지막에는 집사에게 역병을 풀게 한다. 탁자 위에 손을 대는 쪽은 언제나 서 있는 사람이다. 신의 몸에서 탁자에 닿는 것은 올려놓은 두 발뿐이다. 앉은 자리와 선 자리가 명령과 집행을 나누는 셈이다. 회사의 회의실에서도, 식당의 주방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난다. 앉은 사람은 결정하고 선 사람은 나른다.
탁자의 크기를 보자. 사람 키의 몇 배는 되는 탁자가 방을 거의 채우고, 그 위에서 코끼리는 손가락 한 마디쯤이고 사람은 그보다 작다. 조직이 한 사람에게 내어 준 책상의 크기가 그 사람의 자리라면, 이 신이 인간에게 내어 준 자리는 탁자 위의 몇 센티미터다. 반대로 신 자신이 차지한 것을 보자. 그는 가죽 의자에 앉아 다리를 탁자 위에 올리고, 옆에는 찻잔과 접시가 놓인 작은 탁자가 따로 있다. 무릎 위에는 두 손으로 펼쳐야 하는 커다란 책이 있다. 신에게 세계는 발을 올려놓는 받침이고, 책은 세계보다 크다. 세상을 만든 자가 세상이 아니라 설명서를 들여다본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면, 이 자리는 무관심을 만든다고 읽을 수 있다.

불 장면을 보자. 인간이 불을 피우자 신은 당황한다. 왜 하필 불일까? 불은 인간이 처음으로 자기 자리에서 위로 올려 보낸 것이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연기와 빛은 위로 간다. 탁자 위의 인간이 처음으로 하늘 쪽을 향해 무엇인가를 보낸 것이다. 시선이 한 방향으로만 흐르는 구조에서 아래가 위로 신호를 보내는 일은 허락되지 않는다. 그래서 신은 불을 끄게 한다. 불이 꺼진 뒤 사람들은 주저앉고, 코끼리에 쫓겨 동굴로 들어간다. 탁자 위에서 유일하게 높이가 있는 곳이 바위 언덕이고, 그 안의 동굴은 하늘이 보이지 않는 자리다. 신의 시선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공간이 탁자 위에서 가장 어두운 곳이라는 점이 묘하다.
기우제 장면은 반대 방향이다. 사람들은 하늘을 향해 춤을 추고, 위에서 물이 내려온다. 집사는 "자비로운 신"이라는 말을 붙이며 물을 준다. 아래에서 위로 올라간 것은 춤이고, 위에서 아래로 내려온 것은 물이다. 올라가는 쪽은 보이지 않는 상대를 향하고, 내려오는 쪽은 상대를 다 본다. 성당의 천장이 높고 창이 위쪽에 있는 것도 같은 구조다. 올려다보는 사람은 작아지고, 내려다보는 쪽은 얼굴이 없다. 이 영화는 그 얼굴 없는 자리에 얼굴을 하나 앉혀 놓고, 그 얼굴이 하품하는 것을 보여 주는 셈이다.
마지막 장면을 보자. 집사가 병을 가져와 탁자 위에 뿌린다. 역병이다. 사람들이 쓰러진다. 카메라는 쓰러지는 사람들이 아니라 신의 얼굴에 머문다. 표정이 없다. 첫 장면에서 카메라는 초원의 높이에 있었고, 올라가서 신을 보여 주었다. 마지막 장면에서 카메라는 신의 높이에 있고, 내려가지 않는다. 영화는 아래에서 시작해 위로 올라간 뒤 다시는 내려오지 않는 셈이다. 인간의 높이는 처음과 같이 탁자 위 몇 센티미터이고, 달라진 것은 거기에 서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뿐이다.
공간으로 보면 이 영화는 올려다볼 수 없는 자리에 관한 이야기다. 신이 나쁜 이유를 성격에서 찾을 수도 있겠지만, 자리에서 찾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내려다보는 자리에 앉으면 누구라도 책을 펼치게 된다. 아래에서 올라오는 시선이 없으면 내려다보는 시선은 금방 무뎌진다. 18세기 말 벤담이 제안한 원형 감옥은 가운데 감시탑에서 모든 방을 볼 수 있지만 방에서는 탑 안이 보이지 않게 설계되었다. 이 서재의 탁자는 그 감시탑을 안락의자로 바꾼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차이는 감시탑의 간수는 봐야 하는 사람이고, 이 신은 보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우리 주변에도 탁자가 있다. 높은 층 회의실에 펼쳐 놓은 지도, 관제실의 모니터, 전망대의 난간이 그렇다. 다음에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볼 일이 있으면, 아래에서 올려다봤을 때 내가 보이는 자리인지 한 번 확인해 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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