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2018

일상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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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둥이 치면 사람은 안긴다

고요한땀· 2026. 10. 25.· 2,100자

성애 영화에서 가장 진지한 순간은 어디일까. 옷을 벗는 장면이 아니다. 옷을 벗을 이유를 마련하는 장면이다. 각본은 그 대목에서 가장 성실해지고, 가장 성실해지는 바로 그 지점에서 나는 그만 웃고 말았다. 미안한 일이다. 이 글은 그 미안함의 목록이다.

「일상의 관계」는 76분에 세 개의 이야기를 담은 옴니버스다. 강사와 학생, 병장과 중사, 미용실 수습과 손님. 세 쌍의 사람이 각자의 일터에서 낯선 이성과 만난다. 아래는 영화가 정색하고 찍었을 것이 분명한데 내가 정색을 유지하지 못한 순간들이다. 순서는 영화의 순서다.

  1. 코피. 첫 장의 미영은 일타 강사가 되기 위해 과로로 코피를 쏟는다. 코피란 무엇인가. 성실의 가장 고전적인 증명이다. 수험생이 흘리고 고시생이 흘리고, 이제 강사도 흘린다. 가르치는 쪽과 배우는 쪽이 같은 체액으로 성실을 증명하는 세계라면, 그 강의실에서 벌어질 일이 수업만은 아닐 거라는 예감이 코피 한 방울에서 이미 시작된다.
  2. 우산. 미영은 야근 끝에 강의실에 남아 있던 학생 원재와 마주친다. 밖에는 거센 비가 내리고 두 사람 다 우산이 없다. 나는 여기서 잠시 멈췄다. 코피를 쏟을 만큼 매일 늦게까지 남는 사람이 우산을 챙기지 않았다는 것. 그것은 과로의 증거일 수도 있고 각본의 필요일 수도 있다. 둘 다라면 가장 슬프고, 그래서 가장 웃기다.
  3. 천둥. 천둥 소리가 울리고, 놀란 미영이 원재의 품에 안긴다. 시선이 맞닿는다. 소개 글은 그다음을 「거부할 수 없는 본능」이라고 적는다. 천둥은 지구에서 가장 오래된 연출자다. 번개가 치면 사람은 안기고, 안기면 시선이 맞고, 시선이 맞으면 본능이 온다. 이 인과의 사슬이 너무 매끄러워서, 나는 날씨가 각본료를 받아야 한다고 잠깐 생각했다.
  4. 같은 밤의 두 통보. 둘째 장. 크리스마스 휴가를 앞둔 상희 병장은 여자친구 정연에게서 약속이 있다는 말을 듣고 이별을 직감한다. 그런데 매일 그를 갈구던 은영 중사도 같은 밤 연인에게서 비슷한 메시지를 받는다. 한 초소에서 두 사람이 동시에 버려지는 확률을 나는 계산하지 않았다. 계산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이 밤은 우연이 아니라 배치다. 다만 이 장에서 웃음은 여기서 멎는다. 상관과 부하가 같은 밤에 둘만 남는다는 조건은 농담으로 끝날 수 있는 조건이 아니다.
  5. 면접 전날의 이발. 셋째 장. 미용실 수습 정연은 밤마다 마네킹을 앉혀 놓고 연습한다. 그 가게에 기태가 들어와 회사 면접이 있으니 머리를 잘라 달라고 한다. 인생에서 머리 모양이 가장 중요한 날을 앞두고, 손님이 없는 시간에 혼자 남은 수습에게 머리를 맡기는 사람. 그 결단이 나는 조금 존경스럽고 많이 웃겼다. 기태는 서툰 손이 최선을 다하는 모습에 호감을 느낀다. 머리가 어떻게 됐는지는 소개 글에 없다.
일상의 관계 스틸컷

웃음 뒤에 한 칸 전진해 보자. 다섯 순간의 공통점은 「이유」다. 이 영화는 사람이 사람에게 가는 데 이유가 필요하다고 믿는다. 코피, 비, 천둥, 이별 통보, 면접.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챙긴다. 그 성실함이 우습다. 그런데 성실함이 우스운 건 우리가 그 성실함을 매일 쓰고 살기 때문이다. 야근이라서, 비가 와서, 오늘 기분이 그래서. 우리도 이유를 먼저 만들고 그다음에 움직인다. 영화는 그 순서를 과장 없이 베껴 왔을 뿐이고, 베낀 것이 너무 정직해서 웃긴다.

영화가 이 우스움을 알고 있는지. 아마 모를 것이다. 소개 글은 끝까지 진지하고, 등급 사유도 진지하고, 76분을 세 장으로 나눈 구성도 진지하다. 알고 찍었다면 그건 다른 종류의 영화였을 것이고, 그 영화가 더 좋았을 거라고 단정할 자신은 없다. 모르고 찍어서 생긴 웃음에는 비웃음이 섞이기 쉽다는 것을 나도 안다. 그래서 첫 화살은 나에게 돌린다. 천둥이 치면 나도 아마 안겼을 것이다.

일상의 관계 포스터

둘째 장의 여자친구와 셋째 장의 수습은 둘 다 정연이라는 이름이다. 같은 사람인지 확인하지 못했다. 같은 사람이라면 상희가 통보를 받은 밤에 정연은 가게에서 마네킹과 함께 있었다는 뜻이 된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내가 웃은 것보다 조금 더 짜임새가 있는 영화고, 나는 조금 덜 웃어야 했다. 확인되기 전까지는 이 한 문장만 남긴다.

추신. 볼까 말까 묻는 사람이 있다면, 날씨 예보를 먼저 보라고 답하겠다. 천둥이 예보된 밤이라면 피하는 게 좋다. 농담이다. 농담이 아닐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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