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2018
일상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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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하던 사람이 위로를 건넬 때
솔직히 말하면 이 영화를 틀 때 계산한 건 하나였어요. 76분. 세 토막짜리 옴니버스니까 한 토막에 이십오 분 남짓. 밥 먹고, 설거지하고, 널어 둔 빨래 걷는 사이에 한 토막씩 보면 딱이겠다 싶었죠. 그런데 둘째 토막에서 빨래를 손에 든 채로 서 있게 됐어요. 그 얘기를 하려고요.
「일상의 관계」는 2018년 여름에 나온 영화예요. 강사와 학생, 병장과 중사, 미용실 수습과 손님. 세 쌍이 각자의 일터에서 낯선 사람과 가까워지는 이야기인데, 등급은 청소년관람불가고 영상물등급위원회가 적어 둔 사유가 꽤 길어요. 그 사유 얘기는 조금 뒤에 할게요. 먼저 둘째 토막.
그 장면
크리스마스 휴가를 앞둔 상희 병장이 불침번을 서요. 하필 짝이 은영 중사예요. 거친 욕설이 기본이고 매일 상희를 갈구는 사람. 상희는 휴가 나가면 여자친구 정연을 만날 생각에 들떠 있는데, 정연이 그날 약속이 있다고 해요. 상희는 거기서 이별을 직감해요. (나도 그 문장 알아요. 「그날 약속이 있어」는 약속 얘기가 아니에요.) 그런데 같은 밤, 은영도 연인한테서 비슷한 메시지를 받아요. 그리고 매일 욕하던 그 사람이 상희를 위로해요. 동병상련이라고 소개 글은 적어 놨더라고요.
나는 여기서 빨래를 든 채로 멈췄어요. 욕하던 사람이 위로를 건네는 순간. 그게 어떤 얼굴인지 내가 알거든요.
그날
첫 직장에서 나를 제일 많이 혼낸 사람은 옆자리 선배였어요. 복사 버튼을 잘못 눌러도 한숨, 전화 받는 목소리가 작아도 한숨. 나는 그 한숨 소리에 어깨가 한 칸씩 내려가는 사람이었고요. 그런데 어느 날 밤, 야근 끝에 둘만 남은 사무실에서 그 선배가 먼저 말을 걸었어요. 「나 오늘 차였다.」 그러고는 편의점에 가서 맥주 두 캔을 사 와 하나를 내 책상에 놓더라고요. 나도 그 주에 차였거든요. 말은 안 했는데 아마 얼굴에 써 있었을 거예요. 그날 우리는 서로의 전 애인 흉을 삼십 분쯤 보다가 각자 집에 갔어요. 다음 날 선배는 다시 한숨을 쉬었고요. 그런데 그 한숨이 그날부터는 안 무서웠어요. 그 사람이 우는 얼굴을 봤으니까.
그래서 둘째 토막의 그 밤을 나는 반전으로 안 봤어요. 매일 욕하던 사람이 갑자기 다정해지는 게 아니라, 원래 그 사람도 차이는 사람이었다는 게 드러나는 밤이에요. 상희가 은영에게 이전과는 다른 감정을 느낀다는 대목도 그래서 이해가 갔고요. 사람은 자기한테 욕한 사람보다 자기 앞에서 무너진 사람을 더 오래 기억하거든요. (울었냐고요? 조금요. 이유는 모르겠어요. 빨래가 덜 말라서 그랬을지도.)
그 장면, 그다음
그런데 여기서 정색을 해야겠어요. 영상물등급위원회가 이 영화에 적어 둔 사유에는 「군대 내 성폭행 시도 장면」이라는 말이 있어요. 둘째 토막 안의 일이에요. 위로에서 시작한 밤이 그쪽으로 간다는 뜻이고, 나는 그 길을 내 사연으로 덮어 줄 수가 없어요. 내 선배는 맥주 한 캔을 내 책상에 놓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어요. 그게 위로의 끝이었고, 그래서 위로였어요. 상관과 부하가 둘만 남은 초소에서 위로가 다른 데로 넘어간다면 그건 동병상련이라는 말로 부를 수 있는 밤이 아니에요. 영화가 그 장면을 어떤 얼굴로 찍었는지는 여기서 설명하지 않을게요. 내가 좋았던 건 그 앞까지라는 것만 적어 둬요.
그 장면, 셋째
셋째 토막은 짧게요. 미용실 수습 정연이 밤마다 마네킹을 의자에 앉혀 놓고 가위 연습을 해요. 거기에 기태가 들어와요. 회사 면접이 있으니 머리를 잘라 달라고. 정연은 서툴고, 서툰 대로 최선을 다하고, 기태는 그 모습에 호감이 생겨요. 둘째 토막을 보고 난 뒤라 이 장면이 나한테는 조금 다르게 보였어요. 여기도 위로예요. 밤마다 혼자 연습하던 사람한테 누가 자기 머리를 맡기는 것. 「너 못해도 돼」가 아니라 「네가 해 줘」. 내 선배의 맥주 한 캔이랑 같은 종류의 말이더라고요.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건 칭찬이 아니라 부탁일 때가 많아요. 마네킹은 부탁을 못 하잖아요. 그래서 정연한테는 기태가 처음으로 부탁한 사람이었을 거예요. 이건 내 풀이고요, 영화는 거기까지 말해 주지 않아요.
그래서 이 영화를 볼까 말까 묻는 분께는 이렇게 말할래요. 둘째 토막의 앞부분과 셋째 토막을 보세요. 욕하던 사람이 위로하는 밤, 혼자 연습하던 사람에게 머리를 맡기는 밤. 그 두 밤만 챙기고 나머지는 각자 알아서 하시고요!
추신. 그 선배는 지금도 가끔 연락이 와요. 여전히 한숨부터 쉬고요. 나는 이제 그 한숨이 좀 반가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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