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2026
가족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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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합차 한 대로 로드무비 관습을 세어 봤다
로드무비에서 차가 느리면 무슨 일이 생기나. 보통은 아무 일도 안 생긴다. 느린 차는 장면을 늘어뜨릴 뿐이라서, 이 장르는 대개 차를 빨리 달리게 하거나 아예 고장을 낸다. 「가족여행」은 셋째 길을 간다. 차를 느리게 둔 채 108분을 간다. 그래서 관습 목록을 들고 봤다. 로드무비와 가족 드라마가 겹치는 자리에 서는 관습 아홉 개를 세우고, 이 영화가 지킨 것과 깬 것과 비튼 것을 표시했다.
설정은 짧다. 치매가 온 시어머니 순임, 그를 돌보며 생계를 맡은 며느리 영주, 10년째 영화감독이 되려는 남편 창욱, 베트남전에 다녀온 시아버지 만철, 자기를 뱀파이어로 여기는 딸 윤진. 주간보호센터가 순임을 더 못 맡겠다고 하자 영주가 순임의 생일을 핑계로 부산행을 제안한다. 차는 거래처 사장에게 빌린 낡은 승합차다. 부산과 기장에서 찍었고, 두 사람이 같이 연출했다.
- 떠날 수밖에 없는 계기 — 지켰다. 로드무비는 주인공을 집에서 밀어내는 사건으로 시작한다. 여기서는 센터의 통보다. 순임이 센터에서 사라졌다가 한밤중 고속도로에서 발견된 뒤에 온 통보라서, 떠나는 이유가 곧 떠나면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길을 잃은 사람을 데리고 길에 나선다.
- 탈것이 등장인물이다 — 지켰고, 세게 밀었다. 승합차는 닭 공급 업체의 홍보 문구와 연락처가 옆면에 그대로 도색돼 있다. 순임이 쓰러지기 전까지 골목 통닭집에서 닭을 튀기던 사람이라는 걸 영화가 앞서 알려 준다. 차가 이 집의 이력서다. 설명은 없다. 그게 맞다.
- 좁은 차 안이 고백실이 된다 — 지켰다. 각본을 쓴 연출자는 이 형식을 고른 이유를 평소 말 안 하던 식구를 한 공간에 몰아넣기 위해서라고 밝혔다. 실제로 그렇게 쓴다. 고속도로에서 창욱이 다른 운전자와 시비가 붙고, 그 소동 속에서 만철이 여행의 진짜 목적을 입 밖에 낸다. 요양원이다. 영주만 아는 비밀인 줄 알았던 것을 시아버지가 알고 있었다는 게 이 장면의 진짜 정보다.
- 길 위의 타인 — 지켰다. 로드무비에는 가족이 아닌 사람이 한 번은 끼어든다. 여기서는 여행 중에 만철과 마주쳐 이야기를 나누는 남자다. 머물지 않고 지나간다. 이 영화에서 식구끼리 못 하는 말이 어디서 나오는지를 생각하면 필요한 배역이다. 분량은 적다. 적어서 됐다.
- 목적지의 뜻이 바뀐다 — 비틀었다. 보통은 가는 도중에 목적지가 바뀐다. 이 영화는 목적지를 부산으로 고정해 두고 그 뜻을 바꾼다. 영주에게는 요양원 가는 길이고, 나머지에게는 생일 여행이다. 같은 주소가 차 안의 사람마다 다른 곳이다. 길은 안 바뀌고 길의 이름만 바뀐다.
- 노래 한 곡이 길을 묶는다 — 지켰다. 순임이 영화 중간에 옛 노래 「세월아」를 부르고, 같은 곡이 엔딩곡으로 다시 나온다. 기억을 잃는 사람이 끝까지 부를 수 있는 것이 옛 노래라는 사실은 이 병을 아는 사람이면 다 아는 사실이고, 영화는 그걸 설명하지 않고 쓴다. 로드무비의 주제가 관습을 가장 싼 값에 가장 정확하게 쓴 경우다.
- 회상 장면 — 지켰다. 젊은 순임, 젊은 창욱, 젊은 만철을 따로 연기한 배우들이 있다. 과거가 끼어든다는 뜻이다. 가족 로드무비는 거의 예외 없이 이 관습을 쓰는데, 이 영화는 짧게 쓴다. 감나무 아래서 순임과 영주가 둘이 웃는 장면처럼 현재의 두 사람이 더 오래 화면에 있다. 회상이 현재를 못 이기게 해 놓았다.
- 아이는 다른 세계에 산다 — 비틀었다. 사춘기 아이가 차 뒷자리에서 이어폰을 꽂는 것이 이 장르의 기본값이다. 윤진은 낮에 햇빛을 피하고 관에 집착한다. 다만 늘 그러는 건 아니다. 뱀파이어 모드와 인간 모드를 바꿔 가며 산다. 다른 세계에 사는 아이라는 관습을, 자기 뜻으로 세계를 오가는 아이로 고쳤다. 이유는 길게 설명하지 않는다. 안 하는 쪽이 맞다.
- 길에서 한 사람이 빠진다 — 지켰다. 로드무비는 출발한 인원과 도착한 인원이 다를 때가 많다. 만철은 고엽제 피해자에 상사로 전역한 사람으로 설정돼 있고, 그 역을 맡은 배우는 참전 후유증으로 서서히 죽어 가는 인물이라고 설명했다. 데려다주려고 떠난 사람 말고 다른 사람의 시간이 먼저 끝난다는 뜻이다. 그 말이 영화 안에서 어디까지 가는지는 적지 않는다.
아홉 개 중 일곱을 지켰고 둘을 비틀었다. 깬 것은 없다. 숫자만 보면 보수적인 영화다. 그런데 지킨 일곱 개가 하나같이 설명 없이 지켜졌다는 점이 다르다. 차 옆면 글자도, 노래도, 아이의 관도, 영화는 한 번도 카메라를 들이대며 뜻을 풀지 않는다. 관습을 지키되 관습의 해설은 안 한다. 이 장르에서 이게 생각보다 드물다.
한 가지 더. 이 영화의 각본을 쓴 사람은 자기 어머니가 혈관성 치매 진단을 받은 뒤 어머니의 말과 행동을 일기처럼 적었고 그 기록이 시나리오가 됐다고 밝혔다. 슬프지 않게 찍으려 했다고도 했다. 로드무비의 관습 하나하나가 실제로 겪은 일의 순서와 겹친 결과일 것이다. 관습이 아니라 기록이었기 때문에 해설이 필요 없었던 건지도 모른다. 이건 추측이다.
그래서 이 장르 팬은 아홉 칸이 거의 다 채워지는 것을 보며 안심하고 볼 수 있다. 느린 차가 거슬리면 그게 이 영화의 속도라는 걸 받아들여야 한다. 로드무비를 안 좋아하는 사람은 차 안 장면이 길다고 느낄 텐데, 그 대신 치매를 다루면서 한 번도 울라고 시키지 않는 영화를 보게 된다. 그쪽을 보러 가도 된다.
(덧) 차가 느린 게 거슬린다면 하나만 생각하면 된다. 이 집에서 제대로 굴러가는 건 그 차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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