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 2025
참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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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은 괴물로 잡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떤 이야기가 통쾌하다면, 그 통쾌함이 누구의 몫인지부터 물어야 한다. 대신 때려 주는 사람이 등장할 때 관객이 받는 것은 해방이 아니라 위임이다. 위임은 편하다. 편한 것은 대개 아무것도 바꾸지 않는다.
「참교육」은 열 편짜리 드라마다. 교권이 바닥으로 떨어진 사회에서 정부가 초법적 권한을 가진 교권보호국을 세우고, 감독관 나화진(김무열)이 선을 넘은 학생과 학부모와 교사를 찾아가 그들이 한 것을 그대로 돌려준다. 이 작품은 흔히 무너진 교권을 바로 세우는 이야기로 소개된다. 메인 포스터에는 네 사람이 난장판이 된 복도를 걸어 나오고 그 위에 「저희가 지켜드리겠습니다」라고 적혀 있다. 지켜 준다는 문장의 주어는 들어오는 쪽이고, 목적어는 이미 그 자리에 있던 쪽이다.

나는 다르게 보았다. '참교육'은 교육이 아니라 대행이다. 교육은 당한 사람이 자기 일을 말할 말을 얻는 과정이고, 대행은 당한 사람 대신 누군가가 말해 주는 일이다. 이 작품에서 말하는 쪽은 언제나 검은 정장을 입고 들어오는 어른이다. 피해자는 보호받되 발언하지 않는다.
1화의 시작이 그 구조를 그대로 보여 준다. 복도 끝에서 한 아이가 맞고 있고 다른 아이들은 몰래 구경하거나 고개를 돌린다. 그 장면에서 이야기가 따라가는 사람은 맞는 아이가 아니라 들어오는 어른이다. 아이는 사건의 이유이지 사건의 주어가 아니다. 그러므로 가해가 멈춘 뒤 그 아이가 무엇을 겪었고 무엇을 하기로 했는지는 끝내 말해지지 않는다. (구조된 사람에게는 대사가 잘 주어지지 않는다.)
'교권'이라는 낱말도 의심스럽다. 이 작품의 설정에서 교권보호국은 학생의 교권과 교사의 교권이 모두 무너진 자리에서 피해자 편을 들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설명된다. 그러나 교권은 권한의 이름이지 안전의 이름이 아니다. 교실에서 다치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권한의 회복이 아니라 다치지 않는 조건이다. 교권보호국법 제8조는 감독관의 현장지도와 사건조사를 위한 모든 행위가 다른 기관과 법령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고 정한다. 무너진 것이 제도인데 해법을 제도 바깥에 두었다. 나는 이 교환이 공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극 중 한 문장이 이 작품의 전제를 그대로 드러낸다.
괴물은 괴물로 잡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말은 가해자를 '괴물'이라고 부른다. 괴물은 설명할 필요가 없는 존재다. 설명이 필요 없으면 왜 그런 일이 생겼는지도 물을 필요가 없어진다. 열 편 동안 학교는 계속 새 괴물을 내놓고, 그때마다 같은 사람이 와서 치운다. 문제는 치우는 솜씨가 아니라 왜 매번 새로 생기는가다. 이 작품은 그 질문을 하지 않는다.

임한림(진기주)은 교생으로 위장해 교실에 처음 들어온다. 아이들 앞에서 그가 하는 말은 이렇다. "여러분이 하는 것에 따라 천사도 될 수 있고 악마도 될 수 있으니까 잘 부탁드린다." 나는 이 대사가 불편했다. 아이를 '천사'와 악마로 나누는 말이기 때문이다. 둘 중 하나로 분류된 아이에게는 중간이 허락되지 않고, 중간이 없으면 변할 자리도 없다. 교실에서 가장 위험한 말은 폭언이 아니라 분류다.

내가 끝까지 걸렸던 것은 다른 자리다. 나화진이 이 일에 매달리는 이유는 약혼자 최가윤의 죽음이다. 그는 가윤의 무덤에 주기적으로 가고, 가윤이 남긴 금연 쪽지 때문에 담배를 끊었고, 가윤의 교육관을 이어받는다. 죽은 여자가 산 남자의 사명이 되는 이야기를 나는 너무 많이 보았다. 가윤에게 주어진 것은 생애가 아니라 유품이다. 교권보호국 네 사람 가운데 여성은 임한림 하나이고, 이 작품은 교권을 다시 묻는 데까지는 갔으면서 이 대목에서는 가장 익숙한 배치 안에 그대로 머문다.
결말에서 국회의원 류광필의 비리와 범법 행위가 드러나고 체포동의안이 가결되어 그는 구속된다. 이것을 정의의 실현이라고 부르는 해석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구속된 것은 한 사람이고 복도는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이 드라마가 드러낸 결핍은 대신 때려 줄 사람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맞은 사람이 말할 자리가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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