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2002

아이스 에이지

작품 페이지에서 댓글 반응 보기 →

해마다 두고 가는 가족이 있다는 나무늘보에게

삐딱선· 2026. 10. 31.· 2,320자

이 편지를 쓰게 된 사정부터 말할게요. 지난 주말에 조카 둘이 집에 와서 자고 갔어요. 애들이 밤에 틀어 달라고 한 게 이 영화였고요. 2002년 영화예요. 애들보다 내가 먼저 태어났고, 애들보다 내가 먼저 이 영화를 봤을 텐데, 기억에 남아 있던 건 도토리 쫓는 다람쥐 하나뿐이더라고요. 그래서 이번에 다시 보고 나서야 알았어요. 내가 이 영화에서 제일 좋아하는 건 매머드도 호랑이도 아니고, 수다스럽고 느려 터진 나무늘보라는 걸요. 그래서 편지예요. 받는 사람이 2만 년 전에 사니까 답장은 기대 안 해요.

시드에게.

안녕, 시드. 나는 네가 영화 처음에 눈 뜨는 장면부터 네 편이었어요. 다들 남쪽으로 떠난 아침에 너 혼자 남아 있었잖아요. 그리고 네가 그러죠. 나 빼고 갔어, 매년 이래. 해마다 두고 가는 가족이라니, 그걸 그렇게 투덜거리는 말투로 넘기는 걸 보고 나는 웃다가 조금 멈췄어요. 그건 웃긴 말이 아니었거든요. 너는 웃기게 말하는 법을 아는 애였을 뿐이에요.

그다음에 너는 코뿔소 둘한테 쫓기죠. 걔들이 아껴 둔 민들레를 네가 먹어 버려서요. 거기서 매머드 하나가 너를 구해 줘요. 구해 줬다기보다 구덩이 앞에 버티고 서서, 이 구덩이를 건너오는 쪽이 나무늘보를 가져가라는 식으로 말했죠. 매니가 너를 좋아해서 그런 게 아니라는 건 너도 알고 나도 알아요. 그런데 너는 그날부터 매니 뒤를 따라가요. 매니가 비꼬느라 등에 타고 편히 가라고 한 말을 진담으로 듣고요. 나는 이 뻔뻔함이 좋았어요. 솔직히 말하면 나는 누가 나한테 조금만 잘해 줘도 그 뒤를 따라가는 사람이라(그래서 생긴 흑역사가 몇 개 있는데 그건 편지가 아니라 술자리에서 할 얘기예요), 너를 보며 좀 들켰다 싶었어요.

네가 한 일 중에 내가 제일 오래 생각한 건 강가에서예요. 호랑이한테 쫓기던 사람 엄마가 아기를 안고 폭포로 뛰어들었고, 물가까지 아기를 밀어 올린 뒤에 사라졌잖아요. 매니는 그 아기를 두고 가려고 했어요. 우리 같은 건 없다고, 애초에 우리였던 적이 없다고요. 그때 네가 말했죠. 여기 두고 갈 순 없다고. 시드, 나는 이 장면에서 네가 왜 그렇게 말했는지 영화가 설명해 주지 않아서 더 좋았어요. 가족이 해마다 너를 두고 가니까, 너는 누군가를 두고 가는 쪽이 되기 싫었던 걸까요. 이건 내 짐작이에요. 아마 그럴 것 같아요. 매니는 결국 아기를 사람 무리에 데려다주는 데까지만 돕겠다고, 그다음엔 자기를 내버려 두라고 해요. 그런데 그 데려다주는 데까지가 영화 끝까지였죠.

아이스 에이지 포스터

세 번째는 디에고 일이에요. 디에고가 사실은 하프 피크 아래에 매복을 깔아 두고 너희를 거기까지 데려가던 중이었다는 게 밝혀졌을 때, 무리에서 나가라고 소리친 건 너였어요. 사람 흔적을 쫓을 수 있다며 그 호랑이가 끼어들 때부터 너는 영 못 미더워했고요. 그런데 나중에 디에고가 미안하다고 하니까 네가 뭐라고 했는지 기억나요? 나는 게을러서 원한도 못 품는다고 했잖아요. 시드, 나는 여기서 울었어요. 왜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그 말이 농담인 척하는 용서라서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내가 못 하는 일을 네가 너무 쉽게 해서 그랬던 것 같기도 해요.

그리고 마지막에, 다친 디에고를 두고 떠나야 했을 때 네가 한 말. 우리 잊지 마, 알았지. 매니가 아기를 안아 들고 우리도 널 안 잊을게, 하던 그 장면은 디에고한테 하는 말 같기도 하고 아기한테 하는 말 같기도 해서, 나는 그냥 둘 다라고 받아들이기로 했어요. 아기가 아빠 품에서 까꿍 놀이를 하면 네가 그래, 맞아, 하고 받아 주던 것도요. 그 애는 영화 안에서 끝까지 이름이 불리지 않는다고 해요. 그래도 너희가 붙인 별명은 있었죠.

묻고 싶은 게 하나 있어요. 너는 그 여행 내내 제일 약하고 제일 느린 쪽이었잖아요. 용암 벌판에서 누가 누굴 구하느냐 하는 장면에서도 너는 구하는 쪽은 아니었고요. 그런데 왜 나는, 이게 내가 본 제일 이상한 무리라고 말할 자격이 셋 중에 너한테 제일 있다고 느꼈을까요. 그 무리를 만든 게 너라서 그랬던 걸까요. 매니도 디에고도 자기가 거기 있는 이유를 끝까지 설명하지 않았는데, 너는 처음부터 설명이 필요 없었어요. 그냥 따라갔으니까.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은 이거예요. 해마다 두고 떠나는 가족이 있어도, 네가 두고 떠나지 않은 쪽이 있었다는 걸 네가 알았으면 해요. 마지막에 다 나은 디에고가 목숨이 아홉 개라며 걸어왔을 때 제일 먼저 달려가 안은 것도 너였잖아요. 남쪽으로 가는 길이 따뜻했으면 좋겠어요. 네 말대로 곧 지구가 더워질 거라면 더더욱.

추신. 조카들은 너희 셋이 얼음 동굴을 미끄러져 내려가는 장면에서 제일 많이 웃었어요. 나는 거기선 안 웃고 엉뚱한 데서 울었으니까, 같은 영화를 세 사람이 각자 본 셈이네요. 그 얘기는 다음 편지에.

댓글

0 / 1,000

아직 댓글이 없어요. 첫 댓글을 남겨 주세요

아이스 에이지의 다른 리뷰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