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2002
아이스 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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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하기 단체 여행에 관한 민원 네 건과 답변서
81분짜리 영화다. 2002년에 나왔고, 매머드 한 마리와 나무늘보 한 마리와 검치호랑이 한 마리가 사람 아기 하나를 사람들에게 돌려주러 간다. 가는 길에 코뿔소와 도도새와 용암과 매복이 차례로 나온다. 이 정도 들으시면 장르의 수순을 외우고 계신 분들은 벌써 결말까지 다 보신 것이나 다름없다 하겠다. 그래서 오늘은 감상문 대신 민원을 넣기로 했다. 접수처가 2만 년 전이라 회신은 기대하지 않는다.
민원 1. 전향 시점의 설계에 관하여
검치호랑이 디에고 님은 두목 소토 님으로부터 사람 아기를 산 채로 데려오라는 지시를 받으셨다. 사람들이 무리의 절반을 죽였으니 그 아기로 갚겠다는 것이 두목의 복수 계획이다. 디에고 님은 매머드 매니 님과 나무늘보 시드 님 앞에 나타나 사람 흔적을 쫓을 수 있다며 길잡이를 자청하시고, 두 분을 하프 피크 아래 매복 지점까지 모시고 간다. 여기까지는 수순대로다. 문제는 전향의 시점이다. 용암 벌판에서 매니 님이 목숨을 걸고 디에고 님을 건져 올리시고, 무리에서는 서로를 챙기는 거라고 한마디 하시자, 그 직후에 디에고 님의 마음이 돌아선다. 그 전에 아기를 바라보는 눈빛이 두어 번 흔들리기는 했다. 그러나 말로는 일언반구 해명이 없다. 저는 민간인이라 호랑이의 속을 알 도리가 없으나, 눈빛 두어 번과 용암 한 번으로 복수 계획이 접히는 설계라면 소토 님 쪽에서도 민원이 들어왔을 것이다. 시정 요청: 전향 전에 망설이는 장면 한 컷을 더 주실 것.
민원 2. 사망 처리의 번복에 관하여
하프 피크에서 디에고 님은 매니 님을 덮치는 소토 님에게 몸을 던져 크게 다치신다. 누운 채로, 앞서 들었던 무리에서는 그러는 거라는 말을 되돌려주시고, 시드 님은 우리를 잊지 말라고 하시고, 일행은 아기를 데리고 떠난다. 장르의 수순에 따르면 여기서 디에고 님은 돌아가신 것이다. 그런데 아기를 아버지께 돌려드리고 남쪽으로 발길을 돌리는 순간, 디에고 님이 멀쩡히 걸어오시며 목숨이 아홉 개라는 농담을 하신다. 저로서는 이 번복에 반대할 이유가 없다. 다만 죽은 줄 알았던 동료가 마지막에 걸어오는 수순은 하도 많이 쓰여서, 반가움보다 「역시」가 먼저 나오는 것이 문제라 하겠다. 시정 요청: 다치신 정도를 조금 덜 심각하게 그리시거나, 아니면 영영 못 돌아오게 하시거나. 둘 다 하시는 것은 이중 수혜다.
민원 3. 도도새 농담의 출처에 관하여
길 가운데 도도새 무리가 나온다. 빙하기에 대비한 비상식량이라며 지키는 것이 멜론 세 개다. 매니 님이 그래서 멜론이 세 개냐고 되물으시자, 도도새 대표는 미리 준비하지 못한 쪽이 망하는 거라며 「너희나 망해라」 하는 뜻의 구호를 선창하시고, 무리가 따라 외치다가 한 마리가 제 발로 구덩이에 빠진다. 재미있는 장면이다. 다만 이 장면이 웃기는 이유는, 보시는 분들이 도도새가 이미 멸종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즉 2만 년 뒤의 지식을 가진 사람만 웃을 수 있는 농담을 2만 년 전 인물들 앞에서 하신 것이고, 극 중 매니 님과 시드 님은 영문도 모른 채 멜론 하나를 놓고 실랑이를 벌이셔야 했던 것이다. 시정 요청: 없음. 다만 이 수법은 속편에서도 되풀이될 것이 뻔하니 기록으로 남긴다.
민원 4. 악역 처리를 자연환경에 위탁한 건에 관하여
소토 님의 최후는 이렇다. 매니 님이 소토 님을 벽으로 밀어붙이고, 벽에 매달려 있던 고드름이 떨어져 소토 님 위로 꽂힌다. 즉 주인공은 밀기만 했고 마무리는 고드름이 했다. 주인공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으면서 악역은 확실히 퇴장시키는, 이 장르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위탁 처리 방식이라 하겠다. 아이들이 보는 영화이니 사정은 이해한다. 다만 영화 내내 복수와 죽음을 꽤 정색하고 다루어 놓고, 정작 악역의 죽음만은 우연에 맡기신 것은 균형이 맞지 않는다. 시정 요청: 고드름에도 최소한의 동기 부여를.
그래도 구수한 것
시드 님이 불을 발견하는 장면이다. 어쩌다 불을 붙이고는 앞으로 자기를 「불의 군주 시드」라 부르라고 선언하시는데, 매니 님이 불의 군주, 꼬리에 불 붙었다고 알려 드린다. 장르 수순에 없는 장면은 아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제일 큰 소리로 웃은 데가 여기였다는 사실은 숨길 수 없다. 수순대로 가다가도 사람을 웃기는 것, 그것이 구수함의 본질이었던 것이다.
답변서
귀하의 민원에 대하여 작품을 대신해 답변드린다. 본 작품은 제작사가 장편을 처음 만들어 본 결과물로서, 배경의 대부분이 흰 눈밭인 데는 아마 그만한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81분 안에 세 마리의 사정과 아기 하나의 귀가와 복수극 한 편을 다 넣자면 전향은 눈빛으로, 부활은 농담으로, 악역 퇴장은 고드름으로 처리할 수밖에 없었음을 양해 바란다. 멸종 농담은 관객이 웃으셨으므로 정당하다. 끝으로, 도토리를 쫓는 다람쥐 한 마리가 영화 앞뒤에 붙어 있는 건에 대해서는 본 답변서에서 다루지 않는다. 그 다람쥐는 원래 도입부에만 나올 예정이었다가 반응이 좋아 분량이 늘었다고 하며, 2만 년 뒤 섬에서 얼음이 녹아 깨어나 코코넛을 묻다가 화산을 터뜨리는 데까지 갔으니, 이쪽은 민원이 아니라 별도의 감사 대상이라 하겠다.
아무튼. 민원 네 건에 답변서 한 장을 받고 보니, 다 차려진 밥상을 물린 영화는 아니지만 차려 준 밥은 맛있게 먹었다는 결론이 되겠다.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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