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2026
토이 스토리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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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 놀게 되는 날
누군가에게 더는 필요하지 않게 되는 날은 온다. 그날은 예고 없이 오고, 대개는 상대가 나빠서가 아니라 그 사람이 자라서 온다.
보니는 여덟 살이고 친구를 사귀지 못한다. 왜 아무도 자기 친구가 되어 주지 않느냐고 묻는 아이다. 부모는 개구리 모양 태블릿 릴리패드를 사 준다. 거기 들어 있는 아이들용 채팅 기능은 15초 만에 친구를 만들어 준다. 보니는 무용 교실 아이들과 순식간에 연결되고, 방에 남은 장난감들은 할 일이 없어진다. 그들은 장난감의 시대가 끝났다고 말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 방에서는 그렇다. 다만 끝났다는 말과 쓸모없다는 말은 같은 말이 아니고, 영화는 그 둘을 구분하는 데 한 시간 사십 분을 쓴다. 4편 이후 7년 만에 나온 다섯 번째 편이고, 앤드류 스탠튼이 연출했다. 이번 편의 주인공은 우디가 아니라 제시다. 2편에서 첫 주인 에밀리에게 버려진 기억을 가진 그 카우걸이다. 우디는 4편에서 제 길을 찾아 떠났고, 이번에 제시의 무전을 받고 돌아온다. 돌아왔지만 주인공 자리는 돌려받지 못한다. 영화는 그에게 옛 자리를 내주지 않고, 그는 그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영화는 할 수 있었던 거짓말을 몇 개 하지 않는다. 태블릿을 부수지 않는다. 보니가 태블릿을 버리고 장난감 품으로 돌아오게 만들지 않는다. 에밀리가 어른이 되어 나타나 제시를 안아 주는 장면도 넣지 않는다. 그런 장면은 거짓말이기 때문이다. 버즈가 제시에게 청혼할 타이밍을 못 잡고 쩔쩔매는 곁가지가 붙어 있는데, 없어도 됐다. 완성도에 대해 할 말은 그 정도다.

우리는 버린 쪽이 언젠가 돌아와 사과하리라 믿는다. 그래야 셈이 맞는다고 생각한다. 오지 않는다. 에밀리는 영화 안에서 끝내 어른의 얼굴로 돌아오지 않는다. 제시가 받는 것은 사과가 아니라 다른 것이다. 그 이야기는 뒤에 하겠다. 또 하나의 믿음이 있다. 기계가 아이를 망치고 있으니 기계를 치우면 아이가 돌아오리라는 믿음이다. 영화는 그 믿음에도 손을 들어 주지 않는다. 보니를 다치게 한 것은 태블릿이 아니라 태블릿 너머의 아이들이었고, 그 아이들은 태블릿이 없던 시절에도 같은 짓을 했을 것이다.
가장 부당한 장면은 가방이다. 보니는 같은 반 첼시네 집 파자마 파티에 가면서 릴리패드만 챙기고, 가방에 넣어 두었던 제시와 불스아이는 꺼내지 않는다. 그 집 아이들은 아직도 장난감을 갖고 노느냐며 보니를 놀린다. 제시와 불스아이는 그렇게 보니에게서 떨어져 나가 어느 노부부의 손에 들려 엉뚱한 집으로 실려 간다. 뒤에 채팅방에서 다시 놀림을 받은 보니는 더는 장난감을 갖고 놀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나는 화가 나지 않았다. 여덟 살은 그렇게 한다. 아이가 친구들 앞에서 제 인형을 숨기는 것은 배신이 아니라 자라는 일의 첫 문장이다. 세상은 그렇게 생겼다. 그리고 아이들의 채팅방은 어른들의 그것보다 결코 덜 잔인하지 않다. 영화는 그것을 미화하지 않는다. 보니가 사진 한 장 때문에 놀림감이 되는 과정은 짧고 건조하다. 그래서 더 정확하다.

중요한 건 그다음이다. 제시는 억울해하지 않는다. 보니를 원망하지도 않는다. 자기를 불쌍히 여기는 표정을 짓지 않는다. 실려 간 집이 하필 에밀리가 살던 농가라는 것을 알고도 거기 주저앉지 않는다. 그 집에 사는 블레이즈라는 여자아이가 상상 놀이를 좋아하는 것을 보고, 이 아이라면 보니의 친구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한다. 자기가 보니에게 돌아가는 일보다 보니에게 친구가 생기는 일을 앞에 둔다. 그 방법은 처음엔 틀린다. 제시는 블레이즈의 이름으로 보니에게 사진을 보내 두 아이를 이으려 하고, 그 사진이 첼시네 아이들 채팅방으로 흘러가 보니를 웃음거리로 만든다. 좋은 뜻으로 한 일이 가장 아픈 결과를 낳는다. 제시는 그 결과 앞에서도 남 탓을 하지 않는다. 그 집 마당의 낡은 타이어 그네로 가서 혼자 앉을 뿐이다. 나는 그 순서가 마음에 들었다. 자기가 아니어도 되는 길을 먼저 찾는 것. 릴리패드도 마찬가지다. 보니가 채팅방에서 상처받는 것을 보고 그것이 제 탓임을 알자, 변명하지 않고 기부 트럭에 제 발로 올라탄다. 영화는 이 둘을 선과 악으로 나누지 않는다. 둘 다 보니를 위해 틀린 방법을 골랐고, 둘 다 그것을 인정한다. 자기가 옳았다고 끝까지 우기는 쪽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 이 영화에서 가장 드문 일이다. 인정하는 데서 이야기가 다시 움직인다. 우디의 태도도 같은 줄에 있다. 그는 돌아와서 내내 험한 꼴을 당하고, 끝에는 보핍과 함께 다시 떠난다. 주인공이었던 사람이 조연으로 돌아와 제 몫을 하고 다시 나간다. 영화는 그에게 한 번 더 조명을 주지 않는다. 그는 그것을 서운해하지 않는다. 나는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제시가 받는 것은 농가 마당의 타이어 그네 아래에 있다. 나무 밑에 묻혀 있던 타임캡슐이고, 거기서 제시는 에밀리가 자기 딸에게 제시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에밀리는 돌아오지 않았다. 사과도 없다. 다만 제시와 보낸 시간이 에밀리의 삶 어딘가에 남아 다음 사람의 이름이 되었다. 보상이 아니라 확인이다. 대단한 장면이 아니다. 대단하지 않아서 좋았다. 영화 속 한 대사가 그 자리를 정확히 짚는다. "그녀의 여정에 우리가 도움이 됐다면, 우린 할 일을 한 거야."

마지막은 두 아이가 마주 앉아 노는 장면이다. 보니가 블레이즈네 집 문을 두드리고, 처음엔 서로 어색하다가, 둘 다 좀 이상한 아이라는 것을 알아보고 같이 논다. 제시와 버즈를 결혼시키는 놀이다. 태블릿은 버려지지 않고 그 옆에 함께 있다. 우디는 보핍과 함께 다시 떠난다. 아무도 울지 않고 아무도 사과하지 않는다. 제시는 보니의 유일한 장난감으로 돌아가지 못했고, 대신 보니에게 친구가 생겼다. 자기가 줄어든 자리에 다른 것이 들어오는 것을 제시는 지켜본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지금 누군가의 손에서 내려놓아진 당신에게 말한다. 그 사람은 돌아오지 않는다. 사과도 오지 않는다. 대신 당신이 거기 있었던 시간은 그 사람 어딘가에 남는다. 그것은 확인할 수 없고, 확인하지 않아도 된다. 버티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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