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능 · 2026
언니네 산지직송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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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이라는 말은 누가 붙였나
"전쟁이야, 전쟁."
첫 회에 염정아가 새 동생들한테 한 말이에요. 촬영 한 달 전에 넷이 미리 모인 자리였는데, 둘째 김선영은 이 프로그램이 인생작이라 화장실 갈 때도 일시정지를 한다고 하고, 셋째 강유석은 어릴 때부터 팬이었다고 하고, 다들 들떠 있더라고요. 그 들뜬 사람들한테 맏이가 전쟁이라고 했어요. 그런데 프로그램 소개 글에는 힐링 예능이라고, 무공해 웃음과 사람 사는 온기라고 적혀 있잖아요. 둘 중 하나는 빈말이에요. 열두 회를 다 보고 나서 어느 쪽이 빈말이었는지 적어 봅니다. 그들이 한 말 하나, 내가 본 것 하나, 이렇게 세 번.
그들이 한 말 — 힐링 예능
내가 본 것은 첫날 통영 바다예요. 제작진이 포스터 찍자고 배에 태웠는데, 그게 방갈로 고르는 복불복이었더라고요. 뽑기 결과에 따라 강유석과 노윤서가 탄 배가 그대로 육지에서 멀어졌어요. 남은 둘은 이게 무슨 생이별이냐고 했고, 끌려간 쪽에서는 여기 진짜 지독하다는 말이 나왔어요. 첫날 첫 장면이 납치였어요.
여덟 번째 회에는 광양 노지 연못에 장어가 4천 마리쯤 있다고 했어요. 그걸 다 잡으라고요. 맨손, 맨발로. 염정아와 노윤서는 뻘과 장어를 무서워했고, 게스트로 온 지진희는 30분이면 끝난다고 했대요. 김선영은 잡을수록 신이 나서 방송에서 광인이라고 불렀어요. 장어는 잡아도 손에서 빠져나가잖아요. 그걸 수천 마리. 그 뒤에 계곡에 가서 물총 쏘고 미끄럼을 탔는데, 거기서 김선영과 노윤서가 눈물이 났다고 해요.
힐링은 화면 이쪽에서만 일어나요. 저쪽은 뻘이고 장어고 전쟁이에요. 그러니까 힐링 예능이라는 말은, 남이 고생하는 걸 소파에서 보는 예능이라는 뜻이더라고요. 빈말이라기보다 주어를 빼먹은 말이죠.
그들이 한 말 — 찐가족 사 남매
내가 본 것은 뱀이에요. 다섯 번째 회, 서산 숙소에서 김선영이 방에 뱀이 있다고 뛰쳐나왔고 강유석이 잡으러 들어갔어요. 그런데 그 다음 회에 뒤집히더라고요. 그 뱀 소동이 사 남매가 한 달을 준비해서 제작진을 속인 복수극이었어요. 김선영은 맨발로 뛰어나오는 것까지 연기했고요. 석 달 내내 속기만 하던 사람들이 한 번 되갚은 거예요.
물론 그걸로 끝나지는 않았어요. 제작진이 바로 히든 미션을 내서 꼴찌 한 염정아와 노윤서를 양계장에 보냈고, 둘은 닭을 무서워하다가 달걀 다섯 판을 걷어 왔어요. 강유석은 어쩐지 이번에 평온하다 했다고 하더라고요.
가족은 한 달 동안 남 속일 궁리를 같이 안 해요. 그건 가족이 아니라 공범이에요. 그런데 공범이 가족보다 가깝더라고요. 가족은 같이 안 살아도 가족인데, 공범은 같이 뛰어야 공범이잖아요. 그러니까 찐가족이라는 말은 틀린 게 아니라 약한 말이에요. 같이 속고 같이 되갚은 사이를 가족이라고 부르면 좀 싱겁죠.
그들이 한 말 — 극강 케미
이건 이 시즌의 부제예요. 내가 본 것은 마지막 회에 제작진이 선물한 티셔츠예요. 멤버마다 자기가 한 말이 찍혀 있었어요. 염정아 것에는 노닥노닥할 상황이 아니야, 전쟁이야, 매일. 김선영 것에는 시청자들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전쟁이라는 말이 첫 회에서 마지막 회까지 그대로 왔어요. 티셔츠로.
그러고 나서 넷이 울었어요. 염정아가 부제가 진짜 극강 케미 아니냐고 했고, 김선영은 시청자한테 최선을 다했다고 말하다가 울음이 터졌고, 노윤서도 울었어요. 강유석은 누나 둘과 윤서와 함께해서 행복했다고 했어요. 마지막 자막은 우리가 함께할 또 다른 계절을 기다리며, 였어요.
케미라는 말은 광고 단어잖아요. 내가 본 건 석 달 같이 품 팔던 사람들이 마지막 날 밥 먹고 우는 거였어요. 그건 회사 그만두는 날 송별회에서 일어나는 일이에요. 일 끝나면 헤어지는 게 당연한데 그게 안 당연해지면 우는 거죠. 케미가 아니라 정이고, 정은 같이 일한 시간에서만 나와요. 일은 일이다, 그런데 일을 같이 한 사람은 일이 아니더라고요.
그래서 빈말은 어느 쪽이었냐 하면, 둘 다 아니었어요. 힐링도 맞고 전쟁도 맞아요. 다만 힐링은 보는 사람이 받고 전쟁은 하는 사람이 치른 거예요. 그 사이에 하나가 더 있어요. 아홉 번째 회에 하동 매계마을 어르신 40분께 밥상을 차렸거든요. 돼지갈비찜에 애호박전에 견내량에서 딴 돌미역으로 끓인 소고기미역국. 어르신 한 분이 죽기 전에 이런 일이 다 있다고 하셨어요. 사람 사는 온기라는 말이 들어맞는 자리는 거기 하나였어요. 넷이 고생하는 장면도, 넷이 우는 장면도 아니고, 남의 밥을 차리는 장면.
글쎄, 소개 글 쓰는 사람이 그 장면을 보고 썼는지 안 보고 썼는지는 나도 잘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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