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2015

인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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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내 책상을 치웠을 때 드는 마음에 대하여

삐딱선· 2026. 10. 25.· 2,517자

우리 집 식탁 끝에는 상자가 하나 있어요. 작년 봄에 이사 오면서 「나중에 정리」라고 매직으로 써 붙인 상자인데, 그 나중이 아직도 안 왔어요. 영수증, 고장 난 이어폰, 누구 결혼식 청첩장, 왜 있는지 모르겠는 열쇠 두 개. 밥 먹을 때마다 눈에 들어오고, 눈에 들어올 때마다 「아 저거」 하고, 그러고는 또 안 치워요. 그 상자를 등지고 앉아서 이 영화를 봤는데, 영화가 중간쯤에 제 상자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줄거리는 다들 아시는 대로예요. 일흔 살 벤은 은퇴했고, 아내와 사별한 지 삼 년 반이 됐고, 여행도 골프도 요가도 요리도 해 봤는데 어딘가 비어 있어요. 매일 아침 커피집에 가는 건 하루에 모양을 주려고 그러는 거고요. 그러다 시니어 인턴을 뽑는다는 온라인 의류 회사의 전단지를 보고, 영상을 찍어서 지원해요. 거기서 하는 말이 이거예요. 「경험은 나이 들지 않아요.」 창업 일 년 반 만에 직원 220명을 둔 서른 살 대표 줄스는 이 일흔 살 인턴을 배정받고, 처음에는 다른 부서로 보내려고 해요. 벤은 시키는 일이 없으니까 알아서 할 일을 찾아요. 여기까지는 예상하신 대로 흘러가요.

그런데 그 「알아서 찾은 일」 중 하나가 줄스의 책상이에요. 사무실 한가운데 줄스가 한참 전부터 거슬려하던, 그러나 아무도 손대지 못하던 종이 더미가 있어요. 벤이 그걸 밤사이에 치워요. 아침에 줄스가 와서 보면 깨끗해요. 이 장면이 둘 사이가 바뀌는 자리예요.

인턴 스틸컷

솔직히 말하면 저는 처음에 조금 싫었어요. 남이 내 더미를 치운다는 건 남이 내 더미를 봤다는 뜻이잖아요. (제 상자도 지난 추석에 손님으로 온 어른 한 분이 말없이 반쯤 정리해 두고 가셨거든요. 영수증은 영수증끼리, 열쇠는 지퍼백에. 그걸 발견한 순간 제가 느낀 건 고마움이 아니라 「봤구나」였어요. 들켰다는 기분. 그래서 사흘쯤 그분한테 괜히 퉁명스럽게 굴었어요. 상자는 그 뒤로 다시 반쯤 쌓였고요.) 그 기억 때문에 저는 줄스가 화를 낼 줄 알았어요. 회사에서 제일 바쁜 사람이, 자기 약점을 남이 건드렸을 때.

그런데 영화는 그 장면을 둘이 가까워지는 쪽으로 써요. 그래서 다시 생각해 봤어요. 벤이 치운 건 종이가 아니라 「저 사람은 이걸 못 하고 있다」는 사실이에요. 못 하고 있는 걸 봐 놓고, 그걸로 뭐라 하지 않고, 그냥 치웠어요. 아무 말도 없이. 제 상자를 정리해 주신 분도 그랬다는 걸 저는 그제야 알았어요. 그분은 상자 이야기를 한마디도 안 하셨거든요. 영화를 보고 나서야 그 침묵이 배려였다는 걸 알았고, 그걸 알았을 때 좀 울었어요. 왜 울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식탁 끝에 상자가 있는 사람은 알 거예요.

이 영화의 벤은 그런 식으로 자꾸 「본다」는 걸 해요. 술 취한 운전기사를 보고 자기가 운전대를 잡고, 줄스가 엄마한테 잘못 보낸 이메일을 보고 동료들과 엄마 집에 몰래 들어가 컴퓨터를 지우고(이 대목이 영화에서 제일 웃겨요, 일흔 살이 작전을 짜요 ㅋㅋ), 줄스의 남편 맷이 다른 사람과 있는 걸 보고도 바로 말하지 않아요. 젊은 동료 데이비스한테는 손수건 이야기를 해요. 「손수건을 갖고 다니는 가장 큰 이유는 빌려주기 위해서야.」 이 영화에서 벤이 하는 모든 일이 이 문장 안에 들어 있다고 생각해요. 자기 쓰려고 들고 다니는 게 아니라는 거.

인턴 포스터

두 번째 장면은 샌프란시스코예요. 투자자들이 외부에서 대표를 데려오라고 압박하고, 줄스는 후보를 만나러 가고, 벤이 같이 가요. 호텔에서 화재경보가 울리고, 다시 들어와서는 둘이 한 침대에 나란히 있어요. 거기서 줄스가 말해요. 남편의 일을 알고 있다고. 알면서도 모른 척하고 있다고. 회사를 남에게 맡기면 결혼이 나아질까 싶어서라고. 여기서 저는 정색했어요. 호들갑 떨 자리가 아니에요. 벤은 그 자리에서 해결책을 주지 않아요. 네가 정말 원하는 게 뭔지 다시 생각해 보라고만 해요. 책상 치울 때랑 똑같아요. 보고, 말 안 하고, 옆에 있어요.

줄스는 회사에서 우는 여자가 싫다고 말하는 사람이에요. 술에 취해서는 요즘 남자들이 소년처럼 군다고 한참 투덜대기도 하고요. 그런 사람이 호텔 침대 끝에 앉아서 자기 입으로 그 말을 해요. 저는 그 장면이 책상 장면의 짝이라고 생각해요. 책상은 남이 봐 준 더미고, 호텔은 자기가 꺼내 보인 더미예요. 둘 다 벤 앞에서요.

결말은 아시죠. 남편 맷이 찾아와서 끝났다고, 네 꿈을 밀어 주겠다고 해요. 줄스는 외부 대표 영입을 취소해요. 그 소식을 제일 먼저 벤한테 말하려고 사무실에 가는데 자리가 비어 있어요. 벤은 공원에서 태극권을 하고 있고, 줄스가 좋은 소식이 있다고 하니까 끝나고 듣자고 해요. 그리고 둘이 나란히 서서 천천히 팔을 올려요. 그걸로 끝이에요. 대사도 없이.

영화는 두 시간이고, 이런 이야기가 그렇듯 착한 쪽으로만 가요. 뻔하다고 하면 뻔해요. 그런데 저는 그날 밤 식탁 끝의 상자를 끝까지 정리했어요. 열쇠 두 개는 결국 어디 건지 몰라서 그냥 버렸고요(이건 딴소리인데, 그 열쇠가 뭐였는지 아시는 분은 연락 주세요). 그러고 나서 정리해 주신 분께 늦은 문자를 보냈어요. 고마웠다고. 그분이 보낸 답은 손수건 같았어요. 짧고, 깨끗하고, 빌려주려고 들고 다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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