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2015
인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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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방이 먼저 출근했다
1973년. 벤의 가방은 그해에 만들어졌다. 영화 속에서 누군가 묻는다. 그 가방 얼마나 오래된 거예요. 벤이 답한다. 1973년산 이그제큐티브 애시번 아타셰이고, 이제는 만들지 않는 물건이라고. 나는 이 대답을 들은 뒤로 영화를 사람 대신 가방으로 보기로 했다. 가방이 주인공이라는 뜻은 아니다. 조연도 아니다. 대사는 한 줄도 없다. 다만 중요한 자리마다 그 자리에 있고, 말이 없는 쪽이 제일 많이 말한다는 것을 나는 회의 시간에 배웠다. 그러니 이 글은 가방의 이력서다. 사람의 이력서보다 짧고, 어쩌면 더 정직하다.
이력서의 주인부터 소개한다. 벤은 일흔이다. 전화번호부를 만드는 회사에서 마흔 해 가까이 일했고, 그중 스무 해 넘게 종이 전화번호부 인쇄를 책임지는 부사장이었다. 은퇴했고, 아내는 세상을 떠났다. 영화의 첫 대사가 그걸 요약한다. 사랑과 일, 일과 사랑, 그게 전부라는 유명한 말을 끌어온 뒤에 벤은 덧붙인다. 그런데 나는 은퇴했고 아내는 죽었다. 전부라던 두 개가 전부 없어진 사람이 브루클린의 온라인 옷 가게에 시니어 인턴으로 지원한다. 지원 영상에서 그는 음악가는 은퇴하지 않는다는 말을 어디서 읽었다고 한다. 음악이 다 떨어졌을 때 멈출 뿐이라고. 나는 이 대목에서 조금 긴장했다. 내 안에 음악이 얼마나 남았는지 세어 본 적이 없어서다.
1. 아침, 다시 전쟁터로
첫 출근 날 아침 벤은 가방을 꺼내며 말한다. 다시 전쟁터로, 고맙게도. 혼잣말처럼 들리지만 대상이 있다. 가방이다. 사람에게 하는 인사가 아니라 물건에게 하는 인사이고, 물건에게 하는 인사는 대개 자기 자신에게 하는 인사다. 은퇴한 사람의 집에서 가장 먼저 쉬는 것은 가방이다. 가방은 할 일이 없어지면 옷장 위로 올라가고, 거기서 몇 년을 보낸다. 벤이 가방을 내리는 동작은 그래서 취업보다 복직에 가깝다. 세상이 벤을 다시 부른 게 아니라 벤이 가방을 다시 부른 것이다.
나는 그 장면에서 우리 집 옷장 위를 생각했다. 거기엔 노트북 가방이 하나 있는데 노트북보다 영수증이 많이 들어 있다. 내 가방은 아직 전쟁터로 돌아갈 마음이 없는 것 같다.
2. 책상, 안경집이 둘
사무실에 도착한 벤은 가방을 열고 짐을 꺼낸다. 펜과 연필 세트, 작은 가죽 메모장, 접는 휴대전화, 여행용 시계, 행운의 휴대용 계산기, 안경집 하나, 그리고 안경집 또 하나. 주변 책상은 노트북 한 대로 끝나는 세상이다. 그 한가운데에 물건 일곱 개가 줄을 선다.
나는 이 목록이 영화에서 가장 좋은 농담이라고 생각한다. 설명이 없어서 그렇다. 행운의 계산기라니, 사람은 일흔이 되어도 뭔가에 운을 맡긴다. 안경집이 둘인 것은 하나를 꼭 잃어버리는 사람이라는 뜻이고, 여행용 시계를 가져왔다는 것은 벽시계를 믿지 않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렇다. 가방 안에 든 것은 물건이 아니라 그 사람이 자신에 대해 알고 있는 약점의 목록이다. 약점을 미리 챙겨서 다니는 사람은 적어도 당황하지 않는다. 나는 당황을 챙겨 다니는 쪽이다.
3. 질문, 이제는 만들지 않는다
얼마나 오래된 가방이냐는 질문에 벤이 하는 대답을 다시 본다. 1973년. 이제는 만들지 않는다. 영화의 배경이 2015년이고 벤이 일흔이니, 이 가방을 산 것은 아마 스물여덟 즈음일 것이다. 사회에 나와 처음으로 비싼 물건을 샀을 나이다. 그 가방이 마흔두 해를 버텼다. 가방보다 먼저 사라진 것이 많다. 종이 전화번호부가 사라졌고, 벤의 회사가 쓰던 건물에는 지금 온라인 옷 가게가 들어와 있다. 벤은 어느 날 창가를 가리키며 말한다. 스무 해 넘게 저 창 옆에 앉아 있었다고, 저기가 내 사무실이었다고. 같은 건물에서 같은 사람이, 부사장에서 인턴으로 자리만 바꿔 앉은 것이다.
이제는 만들지 않는다는 말은 그래서 가방 이야기이면서 벤 이야기다. 전화번호부도 이제는 거의 만들지 않고, 벤 같은 직장인도 이제는 만들지 않는다. 다만 가방과 벤의 차이가 하나 있다. 가방은 자기가 단종된 것을 모른다. 그래서 떳떳하다. 벤은 안다. 그런데도 떳떳하다. 그게 이 영화가 말하는 품위 같은 것일 텐데, 나는 여기서 한 번 의심한다. 가방 하나에 이렇게 많은 것을 걸어도 되는가. 영화는 아마 그냥 좋은 소품을 하나 골랐을 뿐일 수도 있다. 그런데 포스터 한가운데에 그 가방을 두고 가방만 따로 찍은 포스터까지 만든 걸 보면, 적어도 영화도 가방에 꽤 많이 걸었던 것 같다.
4. 복제, 중고 시장에서 되살아나다
가방의 이력서 마지막 줄은 벤이 아니라 젊은 동료가 쓴다. 제이슨이 어느 날 같은 가방을 들고 나타난다. 벤저민, 어때요, 이베이에서 찾았어요, 말씀이 맞았어요, 완전 클래식이에요. 이제는 만들지 않는다던 물건이 중고 시장을 거쳐 한 번 더 출근한 것이다. 단종은 끝이 아니라 유통 경로가 바뀐 것이었다.
젊은 사람이 노인의 가방을 따라 사는 일을 나는 과하게 읽지 않으려고 한다. 가방을 따라 산다고 삶을 따라 사는 것은 아니다. 스타일만 가져오는 것이고, 그건 정당하다. 다만 영화는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또 다른 동료 데이비스는 벤에게 오래된 넥타이를 받고, 나중에는 벤의 집에 들어가 산다. 가방이 복제되는 데서 시작해 옷차림이 옮겨 가고 결국 집이 공유된다. 물건에서 시작한 이야기가 사람으로 끝나는 순서다. 나는 그 순서가 맞다고 생각한다. 사람에서 시작했으면 훈계가 됐을 것이다.
그래서 이 가방이 결국 말하는 큰 주제는 시간이다. 마흔두 해 된 물건이 자기보다 어린 회사에 출근하고, 그 회사의 더 어린 사람이 그 물건을 중고로 산다. 시간은 한 방향으로 흐르는데 물건은 가끔 거슬러 올라온다. 사람은 그러지 못한다. 그래서 사람은 물건을 든다. 나는 이 해석이 그럴듯해서 조금 불안하다. 그럴듯한 해석은 대개 글 쓰는 사람에게만 그럴듯하다.
1973년. 그해 그 가방을 산 스물여덟 살은 이 가방이 마흔두 해 뒤 브루클린의 온라인 옷 가게에 출근하게 될 줄 몰랐을 것이다. 나도 옷장 위의 내 가방이 어디로 갈지 모른다. 영수증부터 버려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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