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 2024

재벌X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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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많은 사람도 출근은 하더라고

무뚝뚝· 2026. 10. 13.· 2,988자

재벌 3세가 형사가 된다는 얘기를 듣고, 일단 의심부터 했어요. 돈 많은 사람 얘기는 둘 중 하나거든. 돈으로 다 해결하고 박수 받거나, 돈 때문에 벌 받거나. 둘 다 별로 보고 싶지 않았어요. 주인공이 돈으로 안 되는 게 없는 세상에 산다는 얘기까지 미리 들었고. 열여섯 시간을 그걸 보고 앉아 있을 자신이 없었던 거지. 그래도 금요일 밤에 달리 할 것도 없어서 별 기대 없이 틀었어요.

그런데 이 드라마는 그 두 가지를 다 안 하더라고요. 한수그룹 둘째 아들 진이수라는 사람이 있어요. 경영전략실장인데 출근은 안 하고, 백화점을 통째로 빌려서 서바이벌 게임을 해요. 그러다 클럽에서 친구가 칼에 베이니까 그 남자를 쫓아가서 때려잡고, 마침 그걸 본 여자 형사한테 현행범으로 잡혀요. 알고 보니 그 남자가 두 달 동안 못 잡던 강도살인범이었대. 경찰은 체면이 있고, 아버지는 서울시장 나간다고 기자회견 중이고. 그래서 양쪽이 합의를 봐요. 이 사람이 변호사 자격증이 있으니까, 원래부터 비밀 경찰이었다고 발표하자. 그렇게 형사가 돼요. 사명감 같은 건 하나도 없어요. 그게 다예요.

재벌X형사 스틸컷

근데 그 사람이 그 일을 계속해요. 그게 제일 신기했어요. 돈 때문에 일하는 건 이해가 돼요. 다들 그러고 사니까. 이 사람은 돈이 있잖아. 밤중에 은행장을 불러서 십억을 현금으로 뽑는 사람이에요. 수사에 미끼로 쓸 돈이 필요하다고. 그런 사람이 왜 월급 받는 자리에 매일 나오냐 하면, 심심해서 그래요. 같이 일하는 형사들이 은근히 무시하니까 오기로 사건 하나를 풀었는데, 그게 뿌듯했대. 아무리 놀아도 안 생기던 게 생긴 거지. 저는 그 이유가 마음에 들었어요. 거창하지가 않아서. 심심해서 시작한 일도 매일 나가면 일이에요. 하다 보면 그게 직업이 되는 거고. 남들이 뭐라 부르든 상관없이. 돈 벌려고 하는 일만 일인 건 아니더라고요.

사건들도 요란하지 않아서 좋았어요. 혼자 사는 노인들한테 영정사진을 공짜로 찍어 준다고 찾아가서 죽이고, 떡 먹다 숨 막힌 것처럼 꾸며 놓는 놈들이 나와요. 강력 1팀이 그걸 쫓는데, 이 사람이 팀장하고 팀장 아버지하고 같이 그놈들을 잡아요. 그러고 나서야 팀원으로 쳐 주더라고. 재벌이라서 받아 준 게 아니라 범인을 잡아서 받아 준 거예요. 저는 그 순서가 맞다고 봐요. 어디든 그렇잖아. 처음엔 다 낙하산 취급을 하다가, 일을 하면 그때부터 사람으로 봐요. 그게 억울할 것도 없고. 그냥 그런 거예요.

그 경찰서 앞에 현수막이 걸려 있어요. 안전 1등, 치안 1등. 서장이 기자들 앞에서 이 사람 환영식을 거하게 열면서 그 밑에서 웃어요. 틀린 말은 아닌데 아무 말도 아니잖아. 1등이 뭘로 1등이야. 그 환영식에 팀장 형사는 서장이 시켜서 인형 탈을 쓰고 서 있어요. 경찰 마스코트, 포순이. 자기를 유치장에 넣은 사람이 탈 속에 있는 걸 알면서, 이 사람은 능청스럽게 손을 내밀어요. 뭘 이렇게까지 준비했냐면서. 그 장면에서 좀 웃었어요. 현수막 걸 돈 있으면 탈 쓴 사람 수당이나 주지. 그게 더 치안에 도움이 돼요.

재벌X형사 포스터

그 여자 형사 얘기를 해야겠어요. 강력 1팀 팀장인데 취미가 없어요. 범인 잡는 게 취미래. 수영은 못하고. 형사가 수영 못하는 게 뭐 어때서, 잡으면 되지. 처음 체포한 날이 처음 입 맞춘 날보다 짜릿했다는 사람이에요. 이게 과장 같은데, 그 배우가 그걸 자랑처럼 안 해요. 그냥 그렇게 사는 사람처럼 해요. 아버지가 형사였는데 뇌물 혐의로 잘렸고, 그래서 선배들한테 미움받으면서 버틴 사람이거든요. 그런 사연이면 보통 서러운 얼굴을 하잖아. 이 사람은 안 해요. 귀찮은 얼굴을 해요. 낙하산 재벌이 옆자리에 앉았으니 귀찮지. 서러운 거하고 귀찮은 건 달라요. 서러운 건 남이 봐 주길 바라는 거고, 귀찮은 건 그냥 내 일이 하나 늘어난 거예요. 그 배우가 그 차이를 알더라고. 참 잘하더라고요.

마지막은 가족 얘기예요. 이 사람은 혼외자식이고, 엄마는 어릴 때 죽었어요. 뺑소니로 알고 살았는데 아니었대. 그 뒤로 유일하게 자기 편이던 형이 범인이었어요. 아버지도 형이 죽였고. 열네 번째 회에서 이 사람이 사직서를 내요. 자기는 좋은 형사 될 사람이 아니라면서. 그러고 집에 가서 어릴 때 자기가 숨겨 둔 엄마 수면제를 찾아내요. 거기서부터 다 뒤집히는 거지. 팀원들이 형을 의심한다고 하니까 이 사람이 그래요. 형은 내 옆에 있어 준 유일한 사람이라고. 그러다 엄마가 죽은 현장에서 형 지문이 나온 걸 보고 형을 집으로 불러요. 형이 하는 말이 "너만 없었으면 아무 일 없었다"예요. 그 말을 듣고 이 사람은 형이 가진 걸 다 뺏겠다고 해요. 재산도 지위도 명예도. 울고불고하는 대신 그렇게 말하더라고. 마지막 회에 형은 무기징역을 받고, 이 사람은 그룹 회장 자리에 앉아요. 그러고는 그 자리를 전문경영인한테 넘기고 경찰서로 돌아와요. 흰 코트를 입고 경찰서 전화를 받고 있더라고. 거기서 또 좀 웃었어요. 회장 됐다가 그날로 남 주고 오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런데 사람이 그래요. 돈이 있어서 돌아온 게 아니라, 거기가 자기가 나가던 데라서 돌아온 거예요.

이 드라마가 돈으로 다 해결한다고 뭐라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영장 없이 들어가고, 헬기 타고, 교수 표절 사건에서는 전시회까지 열어 주고. 맞는 말이에요. 그게 억울하냐 하면, 글쎄. 현실에서 돈 없는 형사가 못 잡는 놈을 드라마에서 돈 있는 형사가 잡는 거잖아. 그걸 보면서 속 시원해하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에요. 다만 그게 통쾌하기만 하냐 하면, 그것도 글쎄. 저는 그런 거 잘 몰라요. 돈 있는 사람이 돈 쓰는 걸 보고 화를 내야 하는지 부러워해야 하는지. 둘 다 피곤한 일이에요. 나는 그보다 이 사람이 매일 출근하는 쪽이 더 보기 좋았어요. 돈으로 잡는 건 한 회면 끝나는데, 출근은 열여섯 회 내내 하거든요.

배울 건 없어요. 돈 많은 사람이 심심해서 형사 하다가 형 잡고 다시 출근하는 얘기예요. 그런데 나도 그래요. 왜 이 일을 이렇게 오래 했냐고 물으면 모르겠어요. 하다 보니 했지. 그 사람도 아마 그럴 거예요. 물어보면 심심해서 했다고 하겠지. 그냥 저렇게 사는 사람도 있구나, 하면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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