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 2024

재벌X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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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은 제가 깔겠습니다

삐딱선· 2026. 10. 13.· 3,115자

솔직히 말하면 나는 이 드라마를 좀 이상하게 봤다. 재벌 3세가 형사가 되어 돈으로 수사한다는 드라마고, 다들 헬기와 요트와 전용 드론을 보는데,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 사람이 판을 까는 것만 봤다. 상황극 말이다. 1회에서 진이수 씨는 한수그룹 경영전략실장이면서 출근은 안 하고 '코드 제로'라는 상황극에만 진심인 사람으로 소개된다. 백화점을 통째로 빌려서 범인 팀과 경찰특공대 팀으로 나눠 인질 구출 게임을 하고, 이기고 나서는 경찰 제복을 입은 채로 파티를 한다. 내 안의 무언가가 '저 사람은 역할놀이를 못 놓는다, 무조건 못 놓는다, 끝까지 못 놓는다' 하고 외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날 밤 그는 친구가 칼에 베이는 바람에 범인을 쫓아가 몸싸움을 벌이다가 현행범으로 잡힌다. 유치장 안의 그 사람을 보라. 가슴에 경찰특공대라고 적힌 검은 상황극 복장 그대로, 코에는 반창고를 붙이고 철창 안에 앉아 있다. 경찰 놀이 옷을 입고 진짜 경찰서에 들어간 사람. 나는 여기서 정말 진지하게 웃었다. (나는 학창 시절 학예회에서 경찰 역을 맡았다가 소품 수갑을 못 풀어서 하교할 때까지 차고 다닌 적이 있다. 그러니까 저 복장이 남 일 같지 않았다.) 그런데 드라마는 그 옷을 벗기지 않고 그 위에 진짜 정복을 입힌다. 변호사 자격증이 있으니 특채가 된다고, 그렇게 낙하산으로 형사가 된 것이다. 환영식에서 그는 레드카펫 위에서 경례를 한다. 뒤에는 초록색 스포츠카. 상황극의 승자가 그대로 진짜 무대에 올라간 셈이다.

재벌X형사 스틸컷

나는 이제 상황극이 끝날 거라고 생각했다. 진짜 사건이 오면 놀이는 접는 법이니까. 그런데 안 접는다. 7회와 8회에서 최면으로 사람을 죽였을지 모른다는 가설이 나오자 그는 박준영 형사님을 최면 치료에 들여보낸다. 그러고 나서 경찰서에서 자기가 손가락을 다치자 준영 형사님이 달려와 그 손을 감싸 쥐고, 강현 팀장님은 최면에 걸린 것 같다고 하고, 최경진 형사님은 그 장면을 전부 휴대전화로 찍는다. 복도에서 준영 형사님이 이수 씨를 번쩍 안아 드는 장면까지 있다. 수사가 아니라 단체 상황극이다. 나는 이 대목에서 엉뚱한 걱정을 시작했다. 저 영상은 어디로 갈까. 경진 형사님 휴대전화 저장 공간은 괜찮을까. (나는 단체 채팅방에 올라온 내 사진을 지워 달라고 부탁해 본 적이 세 번 있다. 그래서 찍히는 쪽의 사정을 좀 안다.) 드라마는 그런 걸 단 일 초도 걱정하지 않는다. 나만 최선을 다해 걱정했다.

재벌X형사 포스터

그래도 수사의 이름으로 깐 판 중에 제일 큰 판은 10회의 천도재다. 영화 세트장에서 배우 한유라 씨가 죽고, 매니저가 수상한데 증거가 없자, 진이수 씨는 세트장에 무당을 부르고 영혼을 풀어줘야 한다며 천도재를 연다. 강현 팀장님이 죽은 배우의 영혼인 척 연기한다. 교과서대로만 수사하던 사람이 말이다. 매니저는 무당의 말 한 마디, 손짓 하나에 움찔하다가 끝내 울면서 털어놓는다. "왜 날 배신해. 널 배우로 만들어준 것도 나잖아. 난 널 위해 살았는데." 나는 이 대사를 듣고 웃다가 멈췄다. 널 위해 살았다, 는 말은 집착계의 프리사이즈 같은 문장이다. 누구에게나 대충 맞고, 대충 맞아서 아무도 그 안을 들여다보지 않는다. 그 사람 집 벽에는 그 배우의 사진이 빼곡하게 붙어 있었다. 널 위해 살았다는 문장이 실제로는 어떤 모양인지, 그 벽이 보여 준다. 그 벽 앞에서는 농담이 안 나왔다. 그런데 이 사건에는 판 위의 판이 하나 더 있다. 처음에 범인으로 몰린 선배 배우 백상희 씨는 죽은 날 한유라 씨의 뺨을 때렸는데, 그게 연기 지도였다고 차분하게 설명한다. 손톱 밑에서 나온 자기 DNA도 두드러기 연고를 발라 준 흔적이었다고. 뺨도 연기였고 연고도 돌봄이었던 세트장에서, 연기가 아니었던 건 매니저의 집착 하나였다. 판 위에서는 다 가짜인데 가짜가 아닌 것만 사람을 죽인다.

그러니까 이 사람의 상황극은 처음부터 놀이가 아니었던 건지도 모른다. 12회에서 사이비 단체에 잠입했다가 휴대전화를 빼앗기자 그는 창문틀에 지문 샘플을 끼워 두고 형광등으로 모스 부호를 보낸다. 손이 묶인 채 수조에 빠질 때는 하늘에 한수전자 개발팀이 만든 드론이 떠 있다고 상대를 흔든다. 판을 깔고, 역할을 정하고, 상대가 그 판 위로 올라오게 하는 것. 이 사람은 그 일만은 어려서부터 잘했을 것이다. (나는 어린 진이수가 커다란 집 복도에서 혼자 범인 역과 경찰 역을 번갈아 하는 장면을 상상했다. 드라마에 그런 장면은 없다. 없는데 나는 봤다.) 왜 혼자 놀았을까 하는 질문은 드라마가 뒤에서 답한다.

마지막 회에서 그는 마지막 판을 깐다. 25년 전 어머니가 죽은 집이다. 그 현장에서 나온 신원 미상의 지문이 형 진승주의 것으로 확인되자, 그는 형을 바로 그 집으로 부른다. 세트도 무당도 없다. 그리고 여기서 나는 이 드라마에서 제일 오래 판을 깔아 온 사람이 진이수 씨가 아니었다는 걸 알았다. 형이다. 극 초반 내내 동생 편이던 다정한 형, 안경 너머로 온화하게 웃던 그 사람이 15회에서 자기 어머니에게 "엄마가 원했던 거잖아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한수그룹을 가지라고 그렇게 말했잖아요" 하고 태연하게 말한다. 25년짜리 역할극이었던 것이다. 백화점 하루치 상황극 옆에 이걸 놓으면, 누가 진짜 상황극의 고수였는지 분명해진다. 형은 거기서 아버지가 친자식이 아닌 걸 알까 봐 두려웠다고 말하고, 너만 없었으면 아무 일 없었다고 말한다. 나는 여기서 좀 울었는데 이유는 모르겠다. 울 장면이 아닌 것도 안다. 그냥, 이 사람이 평생 깔아 온 판 중에 처음으로 자기가 범인 역도 경찰 역도 아닌 판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그 판 위에서 그는 그냥 아들이었다.

그래서 코드 제로 이야기로 돌아가야겠다. 1회의 백화점 상황극은 범인 팀이 여자를 납치하고 경찰 팀이 구출하는 놀이였다. 열여섯 회를 다 보고 나니 그 놀이가 다르게 보인다. 이 사람은 어릴 때 어머니가 욕조에서 죽었을 때 그 옆에 있었던 아이였고, 그 기억은 어른들이 최면으로 그림 한 장으로 바꿔 버렸다. 구하지 못한 사람이 평생 구출 놀이를 한 것이다. 백화점을 통째로 빌려서라도, 몇 번이고. 그 놀이가 어느 날 진짜 경찰서에 들어갔고, 진짜 사람을 구했고, 마지막에는 자기 집까지 갔다. 상황극은 이 드라마의 곁가지라고 생각했는데, 상황극이 이 드라마의 전부였다.

다 보고 나서 나는 서랍을 뒤져 그 소품 수갑을 찾아봤다. 없었다.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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