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2026

사진의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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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감독이 두 번째 노인 앞에 카메라를 세울 때

필름속산책자· 2026. 10. 29.· 3,205자

한 사람이 평생 한 가지만 해 온 모습을 찍을 때 카메라는 그 사람의 손 앞에 서야 하는가, 얼굴 앞에 서야 하는가. 이 질문은 「사진의 얼굴」에서 생긴 것이 아니다. 7년 전 같은 감독이 문경의 도공을 찍은 「불숨」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나서 생겼다. 그 영화의 제목은 불이고 이번 영화의 제목은 얼굴이다. 질문에서 시작하겠다. 같은 감독이 두 번째로 노인 앞에 카메라를 세울 때, 그 카메라는 처음과 같은 자리에 섰는가.

전작

「불숨」은 2019년 전주국제영화제의 전주시네마프로젝트 작품으로 처음 공개된 93분짜리 다큐멘터리다. 경북 문경에서 찻사발을 굽던 도공 천한봉과, 그에게 27년을 배우고도 오래 가마를 맡지 못한 딸의 시간을 5년에 걸쳐 찍었다. 나는 이 영화를 보지 못했다. 지금 내가 아는 것은 그때의 기사와 감독이 한 말이다. 감독은 사회초년생 기자 시절에 이 도공에 관한 짧은 기사를 썼고, 20여 년 뒤 인사를 하러 갔더니 그가 20년 전과 똑같은 모습으로 그릇을 만들고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찍기 시작했다고 했다. 영화에는 부녀가 일본 교토에 가서, 조선 도공이 만들었으나 일본의 국보가 된 찻사발을 실제로 보는 장면이 있다. 노인은 자기 그릇을 두고 아직 백이 아니라 구십이라고 말한다. 자연에 맡기는 수밖에 없다고, 욕심내는 사람이 바보라고도 말한다. 감독은 그릇이 1300도를 견딘다는 사실에서 영화의 말을 찾았다. 견디는 것이 명작의 첫 조건이라는 말이었다.

여기서 하나를 적어 두어야 한다. 감독은 「불숨」을 만드는 동안 이 도공을 조명하다가 한 일본 사진가의 흑백사진을 처음 보았고, 그 사진을 쓰려고 허락을 받으러 도쿄에 갔다. 그 사진가의 집에는 평생 찍은 사진 100만여 장이 천장까지 차 있었다. 그것이 「사진의 얼굴」의 시작이다. 사진가는 1970년대부터 10년 동안 문경의 도자기를 찍었던 사람이다. 그러니까 두 영화는 전작과 신작이기 전에 한 장의 사진으로 이어진 영화다. 가마에서 사진으로, 불에서 얼굴로.

사진의 얼굴 스틸컷

이번 작품

「사진의 얼굴」에서 카메라가 자기 자리를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는 곳은 도쿄의 그 방이다. 카메라는 천장 가까이에서 아래를 내려다본다. 사진 더미가 벽처럼 둘러서 있고 그 안쪽에 아흔의 노인이 있다. 감독은 그 방을 처음 봤을 때의 모습으로 찍고 싶었다고 말했다. 사진의 탑이 동굴처럼 서 있고 그 속에 한 사람이 애벌레처럼 웅크린 모습. 2023년에 촬영을 시작했을 때 방은 이미 정돈되어 있었고, 감독은 노인의 손때가 다시 남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거의 마지막에 그 방을 찍었다고 했다. 나는 이 기다림이 「불숨」이 한 도공을 5년 동안 기다린 것과 같은 종류의 기다림이라고 생각한다. 카메라가 위에 선 것은 그를 작게 보려는 것이 아니라 그가 쌓은 것의 높이를 보려는 것이었다고, 나는 읽는다.

또 하나의 자리는 책상이다. 노인은 200자 원고지에 연필을 꾹꾹 눌러 자기 이야기를 쓰고, 그 글을 자기 목소리로 읽는다. 영화는 이 쓰는 모습과 그가 한국에 와서 돌아다니는 모습을 번갈아 붙인다. 감독의 말로는 내레이션 원고는 그가 평생 인터뷰와 책과 작은 잡지에 남긴 문장들을 모아 붙인 것이고, 정작 본인은 전문 성우가 있는데 왜 자기가 읽느냐며 녹음을 싫어했다고 한다. 공항에 내린 그를 녹음실로 데려가 문을 잠갔고, 아내가 원고와 안경을 건네며 다 읽어야 나갈 수 있다고 했다는 이야기까지 읽고 나니, 영화 속에서 그 목소리가 들릴 때 나는 자꾸 닫힌 문을 떠올리게 되었다. 영화 밖의 사실이 영화 안의 소리를 바꾸는 경우다. 당신은 모르고 보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른다. 쓰지 않으려 했다.

세 번째 자리는 미나마타다. 영화는 그가 1960년, 농업대학을 막 나온 나이에 처음 카메라를 들고 갔던 그 바닷가의 위령제에 그를 다시 데려간다. 감독은 그 자리에 가 보고서야 그의 태도를 이해했다고 말했다. 카메라가 그때 어디에 섰는지 나는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하겠다. 다만 감독의 그 말에서 자리를 짐작한다. 아마 그가 무엇을 보는지보다 그가 거기 서 있다는 사실을 찍는 쪽을 택했을 것이다.

사진의 얼굴 포스터

사이

되풀이되는 것은 분명하다. 한 가지를 평생 한 노인, 그리고 그 노인을 오래 기다려서 찍는 감독. 「불숨」의 도공이 그릇을 두고 아직 구십이라고 했다면, 이 영화의 사진가는 개봉 무렵 기사에서 아직 찍지 못한 사진이 하나 있다고 말했다. 통일된 한반도라고 했다. 두 노인 다 끝을 백에 두지 않는다. 감독이 카메라를 세우고 싶어 하는 노인은 그런 노인인 것 같다.

달라진 것은 말의 주인이다. 「불숨」에서 영화의 말은 감독이 찾았다. 1300도, 견딤. 그릇을 굽는 사람은 일을 하고 말은 찍는 사람이 골랐다. 「사진의 얼굴」에서 감독은 말을 주인공에게 넘겼다. 원고지 위의 연필, 본인의 목소리. 그런데 끝까지 넘긴 것은 아니다. 감독은 그가 다시 태어난다면 샐러리맨이 되고 싶다고 한 말을 엔딩에 몇 번 넣었다 뺐다 하다가 결국 뺐다고 했다. 그 말을 넣으면 사진가의 인생을 오해하는 사람이 있을 것 같아서라고 했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 노인이 하는 말은 전부 노인의 말이지만, 어느 말을 마지막에 둘지는 여전히 카메라 뒤의 사람이 정했다. 나는 이것을 흠으로 적는 것이 아니다. 두 번째 노인 앞에서 감독이 카메라를 한 걸음 물렸고, 그러나 끝내 손을 떼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적는 것이다.

같은 질문을 다시 묻고 있는가. 「불숨」의 질문이 견딜 수 있는가였다면, 이번 영화의 질문은 기억할 수 있는가다. 감독은 제목에 대해, 동두천 기지촌처럼 분명히 있었으나 우리가 억지로 지운 우리의 얼굴을 이 사진가가 대신 기억해 주었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견딘 사람을 찍은 영화 다음에 견딘 것을 본 사람을 찍은 영화가 왔다. 나는 이것이 같은 질문의 뒷면이라고 생각한다. 견딘 것은 누가 보았는가. 본 사람은 무엇으로 견뎠는가.

영화를 지지하는가. 지지한다. 한 문장으로 쓰면, 이 영화는 사진을 찍은 영화가 아니라 사진을 쌓아 둔 방을 찍은 영화이고, 그 방을 찍기 위해 다시 어질러지기를 기다린 영화다. 망설이는 곳도 적는다. 사진에 목소리가 따라붙는 시간은 길고 사진 혼자 있는 시간은 짧게 느껴졌다. 이것은 「불숨」을 보지 못한 사람의 망설임이니 반쯤만 믿어도 된다.

마지막 질문은 당신에게 넘긴다. 같은 감독이 세 번째 노인 앞에 카메라를 세운다면 그때 카메라는 어디에 서야 하는가. 감독은 다음 영화로 제주 4·3을, 이번에는 희생자가 아니라 가해자의 흔적을 좇는 방식으로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노인이 아닐지도 모른다. 얼굴이 아닐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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