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1991
양들의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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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긴 쪽이 더 정중했다
스릴러가 관객과 맺는 약속은 하나다. 긴장을 줄 테니 끝까지 앉아 있으라는 것. 그리고 그 약속에는 작은 글씨로 적힌 조항이 몇 개 딸려 있다. 단서는 공정하게 주겠다. 범인은 마지막에 잡히거나 죽는다. 괴물은 우리 안에 넣어 두겠다. 1991년의 「양들의 침묵」은 큰 글씨의 약속을 지나치게 성실하게 지키고, 작은 글씨의 조항을 하나씩 어긴 영화다. 나는 어긴 쪽을 편들 생각으로 이 글을 쓴다.
약속
정의부터 하자. 긴장이란 관객이 인물보다 조금 더 알거나 조금 덜 알 때 생긴다. 같은 양을 알면 긴장이 없다. 이 영화의 영리함은 그 차이를 시종 한 사람의 몸에 묶어 둔다는 데 있다. FBI 수습요원 클라리스 스탈링. 영화는 그녀가 안개 낀 훈련장에서 밧줄 언덕을 오르고 그물을 타는 데서 시작한다. 관객은 그녀가 아는 만큼만 알고, 그녀가 두려운 만큼만 두렵다. 감독은 그녀와 마주한 사람들이 카메라를 똑바로 보게 찍었다. 우리가 그녀의 눈으로 보고 있다는 뜻이다. 정작 그녀는 상대의 눈을 잘 보지 않는다. 그 시선의 어긋남이 영화 내내 미세한 불안으로 깔린다.
약속의 두 번째 항목, 단서의 공정함도 처음에는 지켜진다. 유리벽 너머의 렉터 박사는 그녀의 피부 크림 냄새를 맡고, 향수는 오늘 뿌리지 않았다고 짚는다. 그리고 이름 하나를 암호로 준다. 그 이름은 창고의 이름이었고, 창고에는 병 속에 담긴 머리가 있었다. 단서는 있었다. 다만 그 단서를 받으려면 그녀가 자기 어린 시절을 한 토막씩 꺼내 주어야 했다. 하나 주면 하나 받는 거래. 긴장의 값을 돈이 아니라 기억으로 치르게 한 것이 이 영화의 첫 번째 발명이다.
이행
약속이 가장 충실하게 이행되는 곳은 지하실이다. 수사에서 제외된 그녀가 오하이오의 어느 집 초인종을 누르고, 집주인의 등 뒤로 나방 한 마리가 날아간다. 남자가 도망치고 그녀가 따라 내려간다. 불이 꺼진다. 남자는 야간투시경을 쓰고 있고 그녀는 완전한 어둠 속에 있다. 카메라가 남자의 시야로 바뀐다. 우리는 그녀의 눈으로 보다가 갑자기 그녀를 보는 쪽에 선다. 그가 권총의 공이치기를 당기는 소리, 그것이 그녀가 얻은 유일한 좌표다. 그녀는 그 소리를 향해 쏘고, 창문이 깨지며 빛이 쏟아져 들어온다.
이 장면을 두고 나는 질투라는 말 외의 말을 찾지 못했다. 관객이 인물보다 더 아는 상태와 덜 아는 상태를 한 장면 안에서 뒤집어 버린 것이다. 밝기만으로. 어둠이 긴장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어둠을 누가 가졌는가가 긴장을 만든다. 모름지기 스릴러란 정보를 쥔 자가 누구인지를 끝까지 숨기는 장르가 아니라, 그것이 바뀌는 순간을 관객이 몸으로 느끼게 하는 장르다. 이걸 어떻게 만들었나. 나라면 못 했다. 어둠 속에서 떨리는 총을 든 여자를 괴물의 눈으로 보게 하면서도, 끝내 괴물 편에 서지 않게 하는 저 균형을.
배반
이제 작은 글씨 조항들이다. 첫째, 범인은 잡힌다. 이 영화에는 괴물이 둘인데 하나만 죽는다. 다른 하나는 펜 조각 하나로 수갑을 풀고, 경비 둘을 죽이고, 죽은 경비의 얼굴을 제 얼굴 위에 덮어쓴 채 구급차로 빠져나간다. 그리고 영화는 그를 다시 잡으러 가지 않는다. 마지막 장면에서 그는 어느 더운 나라의 전화기 앞에 서서, 졸업 파티 중인 그녀에게 전화를 건다. 양들은 이제 울음을 그쳤느냐고 묻는다. 자기는 그녀를 쫓지 않을 테니 같은 예의를 돌려 달라고 한다. 그녀는 거절한다. 그는 오랜 친구를 저녁 식사에 쓸 참이라고 말하고, 자기를 가뒀던 병원장의 뒤를 따라 인파 속으로 들어간다.
스릴러의 결말로서 이것은 명백한 계약 위반이다. 그런데 관객은 이 위반을 받으며 웃는다. 나도 웃었다. 괴물이 전화로 축하를 건네고, 예의를 말하고, 약속을 하나 제안한다. 영화 전체에서 가장 정중한 인물이 가장 위험한 인물이다. 각본의 원래 결말은 더 잔혹했고 감독이 그것을 고쳐 쓰게 했다고 한다. 잔혹한 장면을 지우고 정중한 통화를 넣은 것이다. 피를 덜어내고 긴장을 늘렸으니, 배반치고는 수지가 맞는 배반이다.
둘째, 단서는 공정하게. 감독은 결말 직전에 관객을 속인다. 크로포드의 특공대가 한 집의 문 앞에 서는 장면과, 그녀가 다른 집의 초인종을 누르는 장면을 번갈아 붙인다. 우리는 특공대가 범인의 집에 왔다고 믿는다. 문이 열리면 그 앞에 선 것은 혼자 온 수습요원이다. 편집으로 하는 거짓말이고, 정직한 추리물이라면 해서는 안 될 짓이다. 나는 이 짓을 편든다. 속은 관객이 그 순간 그녀와 같은 처지가 되기 때문이다. 도움은 엉뚱한 곳에 가 있고, 그녀는 혼자다. 속임수가 그 상황을 설명하는 가장 빠른 방법이었다. 만든 사람들의 손을 상상해 본다. 상상이다. 편집실에서 두 집의 문을 나란히 놓고, 어느 문이 먼저 열려야 하는지 몇 번이나 바꿔 붙였을까. 나라면 정직하게 붙였을 것이고, 그래서 덜 무서웠을 것이다.
셋째, 괴물은 어둠 속에. 이 영화의 부검 장면은 환하다. 시골 장례식장, 밝은 불빛 아래, 강에서 건져 올린 여자의 몸을 그녀가 들여다본다. 목구멍에서 나방 고치가 나온다. 감독은 관객이 전부 보기를 원했다고 한다. 공포 영화의 관습은 그림자로 가리는 것인데 이 영화는 불을 켠다. 그리고 그것이 더 무섭다. 어둠은 상상할 여지를 주지만 밝음은 여지를 주지 않는다. 지하실에서 어둠을 그토록 정확하게 쓴 영화가 부검실에서는 어둠을 거부한다. 어디서 어둡고 어디서 밝아야 하는지를 아는 영화다.
인정할 한계도 적는다. 이 영화가 범인을 그린 방식은 개봉 당시부터 지금까지 비판을 받아 왔고, 그가 성별 정체성 때문에 그러는 것이 아니라고 영화가 대사로 못 박았음에도 그 비판에는 정당한 몫이 있다. 변호인이 모든 혐의를 변호할 수는 없다. 나는 장르의 약속에 관해서만 말하고 있다.
그래서 약속은 지켜졌는가. 큰 글씨는 지켜졌다. 118분 동안 긴장은 한 번도 느슨해지지 않는다. 작은 글씨는 셋 다 어겼다. 괴물 하나는 걸어 나갔고, 편집은 거짓말을 했고, 시체는 환한 불빛 아래 눕혀졌다. 그런데 셋 중 어느 것도 긴장을 깎지 않았다. 오히려 늘렸다. 약속을 어겨서 약속을 더 잘 지킨 셈이다. 이 모순을 나는 이 영화의 가장 저급하고 가장 고상한 부분으로 꼽는다. 계약서를 찢는 손이 저렇게 단정하다면, 찢기는 쪽도 할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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