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1991
양들의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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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을 안 해 줘서 무서웠다
왜 저러는 사람일까. 이 영화를 보는 동안 내가 가장 많이 한 생각이고, 영화가 끝까지 대답하지 않은 질문이다. 1991년 영화를 이제야 다시 틀어 놓고 빨래를 개다가 손을 멈춘 건 피 묻은 장면이 아니라 그 대답 없음이었다.
요즘 드라마라면 수순이 뻔하다. 연쇄살인범이 나오면 3화쯤에 어린 시절이 나오고, 6화쯤에 그 어린 시절을 만든 어른이 나오고, 마지막 화에 그 어른 앞에서 한 번 울고 끝난다. 괴물에게 사연을 붙여 주는 것이 요즘의 예의다. 이 영화는 그 예의를 생략한다. 사람을 먹은 정신과 의사 한니발 렉터에게 영화는 과거를 한 줄도 주지 않는다.
없다는 게 어디서 드러나느냐 하면, 우선 그를 소개하는 장면이다. 수습 요원 클라리스 스탈링이 병원에 도착하면 원장 칠턴이 앞장서서 규칙을 읊는다. 유리에 다가가지 말 것, 종이는 부드러운 것만 건넬 것, 연필도 펜도 안 됨. 그러고는 이 사람이 왜 이렇게 위험한지 설명하는 대신 사진 한 장을 꺼낸다. 십 년쯤 전 심전도 검사를 하느라 입마개와 구속 장치를 풀었을 때 간호사에게 한 일이 거기 찍혀 있다. 칠턴이 덧붙이는 말은 그 와중에도 그의 맥박이 85를 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사람에 관해 영화가 내놓는 설명은 이게 다다. 한 단어짜리 진단과 맥박 수치. 원장은 이렇게 말한다.
그는 괴물이에요. 순수한 사이코패스. 산 채로 잡는 일은 아주 드물죠.
괴물이라는 말은 설명이 아니라 포기 선언이다. 설명을 직업으로 가진 사람이 설명을 포기한 자리에서 영화가 시작된다.
두 번째는 첫 만남이다. 스탈링은 설문지를 들고 갔다. 행동과학부가 만든, 연쇄살인범의 심리를 묻는 문항들이다. 유리 너머의 렉터는 그녀가 쓰는 피부 크림 이름을 맞히고 오늘은 향수를 안 뿌렸다고 짚을 만큼 남을 잘 읽는 사람인데, 자기를 읽어 달라는 종이가 들어오자 태도가 바뀐다. 예의 바르던 대화에서 설문지로 넘어가는 솜씨가 서툴다고 타박하고, 이렇게 말한다.
이 무딘 도구로 나를 해부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스탈링 요원?
그러고는 그녀의 차림과 말투에서 출신을 몇 초 만에 읊어 버린다. 스탈링은 물러서지 않는다. 그렇게 잘 보시면 그 눈을 자기 자신에게 돌릴 힘은 있느냐고, 당신 자신을 보고 적어 보라고, 아니면 겁이 나느냐고. 영화에서 그에게 「당신은 왜 그런 사람이냐」는 질문이 정면으로 던져지는 유일한 순간이다. 돌아온 대답은 인구조사원을 간과 콩 요리로 먹었다는 농담과, 학교로 돌아가라는 한마디다. 설문지는 되돌아 나온다. 질문은 유리를 통과하지 못했다.
그 뒤로 그가 자기에 관해 말하는 것은 원하는 것뿐이다. 이 방에 8년을 있었다고, 나무나 물이 보이는 창문 하나를 갖고 싶다고. 무엇을 원하는지는 말하고 왜 그런 사람이 되었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거래는 거꾸로다. 하나 말해 주면 하나 묻겠다는 그 유명한 조건으로 그가 받아 가는 것은 스탈링의 과거다. 영화는 수습 요원의 어린 시절을 양 울음소리까지 들려주면서, 유리 안쪽 남자의 어린 시절은 한 장면도 보여 주지 않는다. 설명되는 쪽은 그녀고, 설명되지 않는 쪽은 그다. (나는 빨래를 다 개고도 한참 그 비대칭을 생각했다. 양말 짝은 못 맞췄다.)
보통의 영화라면 어떻게 했을까. 과거 회상이 한 번은 들어갔을 것이다. 전쟁, 가족, 잃어버린 누구. 실제로 그 과거는 훨씬 뒤에 나온 전편 격 소설에서야 소상히 밝혀진다는데, 1991년의 이 영화는 그 길을 가지 않는다. 상사 크로포드가 스탈링에게 하는 경고가 사실은 영화가 관객에게 하는 경고다. 한니발 렉터를 머릿속에 들이지 마라. 설명을 들이지 않기로 한 영화라서, 대신 들어온 것은 그 사람 자체다.
안 한 덕에 생긴 것이 있다. 그를 맡은 배우의 출연 시간은 재 본 사람마다 열여섯 분이니 스무 분이니 숫자가 다를 만큼 짧다. 그런데 그가 없는 장면에서도 사람들은 그 얘기를 한다. 그가 무슨 짓을 했고 무슨 말을 했는지는 들리고, 왜 그랬는지는 끝까지 안 들린다. 영화는 그를 눈도 거의 깜빡이지 않고 서 있게 찍는다. 유리 뒤에 세워 둔 사람이 사연 없이 거기 서 있기만 하는 것, 그게 이 영화가 가진 공포의 대부분이다.
여기서 한 번 정색하겠다. 우리가 괴물에게 사연을 요구하는 이유는 괴물을 이해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안심하고 싶어서고, 어린 시절이 그랬다니까 그런 일을 겪었다니까 하는 설명이 붙는 순간 그 사람은 나와 다른 경로를 밟은 사람이 되어 그 경로를 안 밟은 나는 안전한 사람이 된다. 이 영화는 그 안심을 끝까지 주지 않는다. 그게 무섭다.
영화 마지막에 그는 전화기 너머에서 그녀에게 안부를 묻고, 저녁 약속이 있다며 끊는다. 이유는 여전히 없다. 괴물은 설명되지 않은 채로 창문을 원하고, 예의를 차리고, 농담을 한다. 안전한 쪽에 서 있다는 느낌이 끝까지 안 든다.
밥이나 먹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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