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2026
비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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흩어진다는 것
세상은 가만히 두면 흩어진다. 열역학 제2법칙이 말하는 것이 이것이다. 흩어진 정도를 재는 양을 엔트로피라고 부른다. 바깥과 아무것도 주고받지 않는 계에서 이 양은 줄어들지 않는다. 그래서 질서는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생긴 질서도 저절로는 유지되지 않는다.
「비광」은 2026년 9월 2일에 개봉한 109분짜리 영화다. 이지원이 쓰고 연출했다. 야구 간판스타 중구와 배우 남미는 톱스타 부부였다. 중구의 딸 동주의 존재가 알려지면서 두 사람은 갈라진다. 여덟 해 뒤 열다섯이 된 동주가 친구가 숨진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된다. 흩어졌던 사람들이 이 아이를 두고 다시 모인다.

과학의 눈으로 보면 이 영화에서 눈에 띄는 것은 사건이 아니다. 흩어지는 데에는 아무 힘도 들지 않았다는 점이다. 아이 하나가 도착했고, 세상이 그 일을 떠들었고, 부부는 갈라졌다. 그다음에는 아무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거리는 계속 벌어졌다. 벌어지는 쪽은 일을 할 필요가 없다.
그 거리를 숫자로 한번 재 보자. 여덟 해라고 치면 대략 이천구백 일쯤이다. 한 해를 삼백육십오 일로 잡고 여덟을 곱하면 이천구백이십이니, 어림잡아 그쯤이 맞다. 하루에 한 번씩만 서로를 떠올렸다고 쳐도 이천구백 번이다. 그 이천구백 번 동안 아무도 전화를 걸지 않았다. 흩어짐은 그렇게 공짜로 쌓인다.
중구는 그 여덟 해 동안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다. 한 번 붙은 소문은 잘 떨어지지 않는다. 마찰은 움직이려는 쪽을 늘 반대 방향으로 민다. 멈춰 있는 것을 처음 움직이게 할 때 가장 큰 힘이 든다. 이미 구르고 있는 쪽은 적은 힘으로도 계속 간다. 이 집은 여덟 해 동안 멈춰 있었다.
영화가 사람을 놓아두는 자리도 대개 낮은 곳이다. 사건은 우림천 교각에서 났다. 아버지가 사는 곳은 복도식 다세대 아파트다. 떨어지는 데에는 힘이 들지 않는다. 떨어지는 동안 속도는 오히려 붙는다. 힘이 드는 쪽은 언제나 올라가는 쪽이다.
엔트로피는 어려운 말이 아니다. 깨끗한 방, 식지 않는 국, 녹지 않는 얼음을 떠올리면 된다. 셋 다 저절로는 유지되지 않는다. 치우고 데우고 얼리는 일에 바깥에서 에너지를 들여야 한다. 중구가 하는 일도 같은 종류의 일이다. 그는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상태에서 남은 시간과 몸을 거기에 넣는다.
남미 쪽의 변화도 같은 법칙으로 적을 수 있다. 한때 영화 간판 맨 위에 있던 사람이 지금은 리포터로 카메라 앞에 선다. 자리를 잃는 데에는 한 번이면 되고 되찾는 데에는 여러 번이 든다. 이런 성질을 비가역이라고 부른다. 물에 한번 섞인 잉크는 저절로 물에서 빠져나오지 않는다. 빼내는 일은 가능하지만 바깥에서 에너지를 들여야 하고, 그 대가로 전체의 엔트로피는 오히려 늘어난다.

감독은 이 인물을 야구선수로 둔 이유를 설명한 적이 있다. 야구는 홈으로 돌아가야 끝나는 경기라는 것이다. 치고 나간 주자는 한 바퀴를 돌아 출발점에 와야 점수가 된다. 물리에서는 제자리로 돌아오는 이런 길을 닫힌 경로라고 부른다. 닫힌 경로를 한 바퀴 돌면 중력이 한 일은 0이다. 여덟 해를 걸어 제자리로 돌아온 사람에게 중력은 아무것도 주지 않는다.
야구에서 점수는 한 바퀴를 다 돌아야 생긴다. 삼루까지 가 있어도 그 자체로는 0점이다. 이 집 사람들이 여덟 해 동안 서 있던 자리가 그쯤이다. 각자 어딘가까지는 가 있었고 아무도 홈을 밟지 않았다. 마지막 구간은 혼자 뛰어서 되는 일이 아니다. 뒤에서 쳐 주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열다섯 살 쪽도 한번 보자. 이 아이는 자기가 한 일 때문에 계산에 들어간 것이 아니다. 자기가 거기 있다는 사실만으로 들어갔다. 어떤 계에서는 입자 하나가 더해지는 것만으로 전체 상태가 달라진다. 사람의 집도 그런 계에 가깝다. 다만 물리에서는 그 입자를 탓하지 않는다. 입자는 자기가 어디로 던져질지 고르지 못한다. 고른 쪽은 늘 바깥에 있다.
영화의 길이는 백구 분이다. 그 안에 이천구백 일이 들어간다. 화면에 나오지 않는 날이 대부분이라는 뜻이다. 흩어짐은 그 나오지 않는 날들에 쌓였다. 영화가 보여 주는 쪽은 언제나 결과다. 우리는 변화만 본다. 변하지 않게 붙들어 둔 일은 측정하기 어렵다.
흩어진 것을 도로 모으는 쪽에는 비용이 붙는다. 이 영화에서 그 비용을 치르는 사람은 한 명이 아니다. 중구의 누나와 매형, 어머니까지 같은 쪽으로 움직인다. 한 사람이 낼 수 있는 힘에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여럿이 같은 방향으로 민다. 영화가 가족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 미는 방향이 같은 사람들의 묶음이다.
감독은 잘못한 쪽이 벌을 받는 과정이 빠르게 지나간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래도 가족의 모습으로 끝내는 것이 맞다고 보았다고 했다. 그래서 마지막에 남는 것은 해결이 아니라 배치다.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는 상태다. 이 상태는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누가 계속 에너지를 넣는 동안에만 유지된다.
유지에는 에너지가 든다는 문장은 한쪽만 보면 가혹하다. 반대쪽도 같이 적어 두어야 공평하다. 에너지를 넣는 동안에는 질서가 유지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여덟 해 동안 아무도 넣지 않아서 흩어진 것이고, 다시 넣기 시작해서 모인 것이다. 그러니 이 영화가 말하는 가족은 상태가 아니라 과정에 가깝다. 넣기를 멈추면 식는다.
제목에 든 광은 빛이라는 뜻이다. 물리에서 빛난다는 것은 에너지를 내보낸다는 뜻이다. 스스로 빛나는 것은 모두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별이 그렇다. 빛을 내는 동안 별은 자기 연료를 쓴다. 이 영화에서 서로를 비추는 사람들이 하는 일도 그와 같다. 비추는 쪽은 그만큼 줄어든다.
법칙은 이 사람들의 사정을 모른다. 우주는 누가 누명을 썼는지 모른다. 비도 모른다. 비는 억울한 사람과 억울하지 않은 사람에게 같은 양으로 내린다. 다른 것은 우산을 쓴 쪽과 안 쓴 쪽뿐이다. 제목에 들어 있는 비도 그런 비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의미를 보았다. 흩어지는 것이 기본값인 세상에서 이 사람들은 모이는 쪽을 골랐다. 그 선택에 우주가 상을 주지는 않는다. 이천구백 일이 지난 뒤에 한자리에 앉은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그렇게 읽은 것은 법칙이 아니라 나다.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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