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1994

사탄 탱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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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를 한 번도 못 본 사람

붓끝수다· 2026. 10. 29.· 2,872자

일곱 시간이 넘는 영화에서 끝까지 자리를 뜨지 않은 사람은 누구인가. 답은 쉽다. 의사다. 창가에 앉아 마을을 공책에 적던 사람. 영화는 그로 시작하지 않지만 그로 끝난다. 그런데 나는 다른 사람을 떠올렸다. 술집 주인이다. 그도 뜨지 않았다. 다만 영화가 그를 끝까지 따라가지 않았을 뿐이다.

먼저 이 영화의 틀을 적어 둔다. 헝가리의 어느 무너진 집단농장. 비는 그치지 않고, 열두 장으로 나뉜 이야기는 탱고처럼 여섯 걸음 나아가고 여섯 걸음 물러난다. 1994년에 만들어졌고 상영 시간은 439분. 올해 9월에 한국에서 처음 정식으로 개봉했다. 열두 장 가운데 두 장의 제목이 「거미의 일」이다. 하나는 I, 하나는 II. 둘 다 술집에서 벌어진다.

거미의 일이라는 제목을 받은 장소의 주인이 술집 주인이다. 그런데 그는 거미를 본 적이 없다. 원작 소설이 그렇게 적는다. 술집에서 무엇이든 잠깐 놔두면 거미줄이 덮인다. 잔에도, 재떨이에도. 그는 거미를 찾아다니지만 한 마리도 보지 못한다. 영화는 이 설정을 말로 옮긴다. 춤이 끝나갈 무렵 해설자의 목소리가 들어와, 아코디언 소리에 맞춰 거미들이 잔과 컵과 재떨이 위에 느슨한 줄을 친다고 말한다. 숨은 구석에서 거미들은 모든 작은 움직임을 본다고.

그러니 이 술집에는 보는 자가 둘 있다. 거미와 주인. 거미는 다 보고, 주인은 거미를 못 본다. 영화는 거미 편에 선다. 통념도 그렇다. 이 영화를 두고 사람들은 이리미아시의 거미줄을 말한다. 마을 사람들을 한 명씩 걸어 들이는 사기꾼의 그물.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런데 그 그물이 쳐지는 동안 술을 따르고, 바닥에 토한 사람을 끌어다 앉히고, 아이를 찾는 어머니에게 대답한 사람에 대해서는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사탄 탱고 스틸컷

그가 하는 일을 세어 본다.

마차꾼 켈레멘이 들어와 이리미아시와 페트리나가 돌아온다고 떠들 때, 그 말을 받아 주는 사람은 주인이다. 손님들이 취해 갈 때 그는 잔을 채운다. 후터키가 밖에서 비를 맞으며 토하고 진흙에 뒹굴 때, 그를 끌어 들여오는 사람도 주인이다. 돼지처럼 진흙에 뒹군다고, 정신이 나갔냐고 소리치면서. 술자리가 흐트러질 때 여기는 그런 집이 아니라고 못 박는 사람도 그다. 그리고 에슈티케의 어머니가 들어와 작은애를 못 찾겠다고 할 때, 돌아올 거라고, 돌아다니는 애가 아니라고 답한 사람도 그다.

마지막 것은 틀린 말이었다. 아이는 그 밤 돌아오지 않았다. 아이는 그 시각 술집 창밖에 서서 안에서 춤추는 어른들을 들여다보고 있었고, 안에 있던 누구도 그 얼굴을 보지 못했다. 거미는 모든 작은 움직임을 본다고 했다. 창 밖은 보지 못했다. 주인도 보지 못했다. 둘 중 하나는 그래도 되는 존재고, 하나는 그래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 영화는 둘을 가르지 않는다.

아이가 죽은 뒤에도 그의 일은 남는다. 영화 후반, 아이의 관을 들어 차에 올리는 사람이 술집 주인이다. 그 뒤로 영화는 그를 다시 비추지 않는다. 마을 사람들은 이리미아시를 따라 집을 부수고 노래를 부르며 떠난다. 원작 소설은 떠나는 사람들이 남은 사람들을 어떻게 보았는지 적어 두었다. 술집 주인, 아이의 어머니와 언니들, 눈먼 사람. 떠나는 쪽은 남는 쪽을 깔보았다고.

떠나는 쪽은 트럭에 실려 도시로 가서 한 사람에 천 포린트씩 받고 각자 다른 마을로 흩어진다. 남은 쪽은 흩어지지 않았다. 나는 여기서 멈춘다. 이 영화에서 가장 흔한 평은 이렇다. 사람들은 메시아를 기다렸고, 메시아는 사기꾼이었고, 모두가 속았다. 그런데 모두가 속지는 않았다. 속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고, 영화는 그들에게 설명을 주지 않았다. 속지 않은 이유가 지혜였는지, 갈 곳이 없어서였는지, 가게를 비울 수 없어서였는지. 아마 셋 다일 것이다. 셋 다라면 그것은 미덕이 아니라 사정이다. 그래도 사정에는 사정의 몫이 있다.

사탄 탱고 포스터

술집 주인의 자리에서 이 이야기를 다시 놓아 본다. 그에게 이리미아시의 귀환은 구원의 소식이 아니다. 손님이 느는 밤이다. 아이의 죽음은 세계의 심판이 아니다. 어제 아이를 찾던 어머니에게 한 대답이 틀렸다는 사실이다. 집단농장의 붕괴는 시대의 비유가 아니다. 장사가 되지 않는 가게다. 원작 소설에서 그는 장사가 실 한 가닥에 매달려 있다고 느끼고, 창고에 들어가 의미 없는 숫자를 적거나 문 뒤에서 소리를 지른다. 영화는 그 창고를 보여 주지 않는다. 대신 거미줄을 보여 준다. 그가 못 보는 것을 우리는 본다. 그것이 이 영화가 그를 쓰는 방식이다. 보지 못하는 사람으로. 거미줄이 덮이는 배경으로.

나는 이 배치가 공정한지 묻고 싶다. 이 영화에서 쓰는 사람은 전부 남을 쓰는 사람이다. 의사는 창 안에서 이웃을 적고, 이리미아시는 마을 사람들을 적어 보고서로 넘긴다. 적는 사람들에게 영화는 장을 하나씩 주었다. 술집 주인은 적지 않는다. 그는 따르고, 끌어오고, 들어 올린다. 그에게는 거미줄을 주었다.

물론 나의 이 읽기도 한 번 뒤집어야 한다. 그를 떠받칠 이유가 그에게 있는가. 그는 아이의 어머니에게 안심시키는 말을 했고 아이를 찾으러 나가지는 않았다. 여기는 그런 집이 아니라고 말한 그 입이 손님들의 잔은 계속 채웠다. 그는 선한 사람이 아니다. 그냥 남은 사람이다. 남은 사람에게 서사가 없다는 것과 남은 사람이 옳다는 것은 다른 말이다. 나는 앞의 것만 말하고 있다. 뒤의 것을 말할 근거는 영화 어디에도 없고, 그 없음이 아마 이 영화가 의도한 바일 것이다.

그래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간다. 끝까지 자리를 뜨지 않은 사람은 누구인가. 의사는 열사흘 병원에 있다가 돌아온 사람이다. 떠났다가 돌아왔다. 술집 주인은 떠난 적이 없다. 영화가 떠났다. 관을 실은 뒤 카메라가 다른 데로 갔고, 다시 오지 않았다. 거미를 한 번도 못 본 사람이 거미줄 속에 남았다. 그 뒤 술집에 무엇이 덮였는지, 영화는 적어 두지 않았다. 적어 두지 않은 것은 없었던 것이 되는가.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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