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1994
사탄 탱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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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코디언이 한 번이라도 곡을 바꿨다면
일곱 시간을 못 버틸 것 같다는 사람에게 먼저 말한다. 이 영화는 버티는 영화가 아니다. 듣는 영화다. 비, 바람, 아코디언, 그리고 종. 그 넷이 이 영화의 옷이고 소품이고 음악이다. 나는 그중 셋에 대해 판정을 내리고 싶어서 이 글을 쓴다. 통과시킬 것과 아닌 것.
헝가리의 망한 집단농장, 1994년, 흑백, 439분, 샷 150개 남짓. 열두 장이 탱고처럼 여섯 걸음 나가고 여섯 걸음 물러난다. 이 정도만 알고 보면 된다. 줄거리는 짧다. 죽은 줄 알았던 남자가 돌아와 마을 사람들의 돈을 가져간다. 나머지 일곱 시간은 그 짧은 줄거리를 사람들이 걸어서 통과하는 시간이다.
먼저 옷. 이 영화에서 사람들은 외투와 모자를 벗지 않는다. 비가 그치지 않으니 당연한데, 그 외투들이 전부 비슷하게 낡고 비슷하게 어둡다. 누가 누군지는 걸음으로 가린다. 다리를 끄는 사람이 후터키다. 그 속으로 돌아온 남자, 이리미아시가 들어온다. 검은 외투, 그리고 그 마을에서 가장 멀쩡한 모자. 뒤에서 찍은 걷는 장면이 여러 번 나오는데, 바람에 쓰레기와 검은 낙엽이 화면으로 날아들고, 아마 기계로 일으킨 바람일 것이다, 그 속에서 검은 외투 하나가 흔들리지 않고 걷는다. 판정은 맞다. 이 영화의 사기꾼은 말로만 믿음을 사지 않는다. 옷으로 산다. 다들 같은 진창에서 같은 비를 맞는데 한 사람만 모자가 제대로 얹혀 있다면 사람들은 그를 따라간다. 사기꾼의 옷이 번쩍이지 않고 그냥 조금 더 멀쩡하다는 점이 정확하다. 번쩍였다면 나는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 마을 사람들도.
옷이 인물을 말해 주는 지점 하나 더. 이리미아시의 검은 옷은 장례식에서 연설할 때 가장 잘 맞는다. 아이가 죽었고, 마을 사람들이 모였고, 검은 외투의 남자가 그들 모두의 탓이라고 말한다. 상복을 입고 온 것처럼 보이는데 그는 상복을 입은 게 아니다. 늘 그 옷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서늘한 우연이다. 아니, 우연이 아닐 것이다.
다음은 음악. 이 영화의 음악은 거의 아코디언 하나다. 이리미아시를 연기한 배우가 음악도 썼다. 술집에서 사람들이 밤새 춤추는 장면이 있는데, 아코디언이 같은 악절을 계속 되풀이한다. 곡이 바뀌지 않는다. 춤추는 사람들도 바뀌지 않는다. 마흔쯤 된 부인과 그 부인을 따라다니는 남자가 엉겨 붙고, 부인의 남편은 관심 없다는 얼굴로 이마에 치즈 빵을 얹어 균형을 잡고, 수염 난 남자는 발뒤꿈치로 박자를 찍으면서 아무도 듣지 않는 말을 한다. 할리치가 슈미트 부인에게 탱고를 청한다. 그게 제목의 탱고다.
나는 되풀이되는 음악이 싫다. 보통은. 영화 음악이 같은 악절을 세 번 넘게 돌리면 그건 감독이 관객에게 울어라 또는 긴장해라 하고 시키는 소리다. 그런데 여기서는 다르다. 아코디언이 한 번이라도 곡을 바꿨다면 나는 껐을 것이다. 곡이 바뀌면 밤이 지나간다는 뜻이고, 이 사람들은 밤이 지나가면 아침에 할 일이 있어야 한다. 없다. 그러니 곡이 안 바뀌는 게 맞다. 판정은 맞다. 이 영화의 아코디언은 음악이 아니라 시계다. 바늘이 안 움직이는 시계.
그리고 종. 이 영화는 종소리로 시작한다. 후터키가 종소리에 잠을 깬다. 그런데 이 마을에 종은 없다. 들판의 외딴 예배당은 전쟁 때 탑이 무너졌고 종도 없다. 그 사실은 영화 맨 끝의 해설이 알려 준다. 그러면 처음에 들린 소리는 무엇이었나. 끝에서 의사가 그 소리를 찾아 나선다. 무너진 예배당 안에 노인이 하나 있고, 종 대신 쇠막대를 두드리고 있다. 두드리면서 소리친다. 터키인들이 온다, 터키인들이 온다.
판정은, 이것만은 틀렸다. 이유를 붙인다. 이 영화는 일곱 시간 동안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았다. 이리미아시가 어디서 왔는지, 그가 구하는 폭약이 왜 필요한지. 안개 낀 폐허에서 그가 무릎을 꿇는 장면도 설명이 없다. 그 설명 없음이 이 영화의 품위였다. 그런데 종만은 설명한다. 종소리의 정체는 노인의 쇠막대였다, 하고. 가장 큰 수수께끼에 가장 작은 답을 붙였다. 하늘의 종소리를 조종 소리로 잘못 들었다고 의사가 적는 대사가 있다. 좋은 문장이다. 그런데 그 문장을 쓰려고 쇠막대 노인을 보여 줄 필요까지는 없었다. 소리만 남겼어도 됐다. 이 영화는 소리만으로 일곱 시간을 끌고 온 영화다. 마지막에 소리의 출처를 보여 준 것은 자기 방식에 대한 배신에 가깝다.
그래도 종의 판정은 뒤집을 수 있다. 쇠막대라는 물건 자체는 맞기 때문이다. 종이 없는 마을에서 종소리를 내려면 쇠막대를 두드려야 한다. 그 마을에서 가능한 유일한 종이다. 메시아가 없는 마을에 돌아온 메시아가 검은 외투의 사기꾼이었던 것과 같은 꼴이다. 가짜지만 그 마을에서 구할 수 있는 최선의 가짜. 그래서 물건은 맞고, 그 물건을 보여 준 결정이 틀렸다. 둘을 나눠 적어 둔다.
마지막 물건은 판정 없이 적는다. 판자다. 의사가 쇠막대 노인을 보고 집에 돌아와 창문에 판자를 친다. 네 장. 한 장 칠 때마다 빛이 한 줄씩 줄고, 네 장째에 화면이 검어진다. 그 어둠 속에서 그는 쓰기 시작한다. 영화 맨 처음에 들렸던 문장을. 시월의 어느 아침, 가을비의 첫 방울이 떨어지기 전, 후터키는 종소리에 잠을 깼다.
나는 이 영화가 일곱 시간 동안 창문이었다고 생각한다. 의사가 앉아 있던 그 창. 밖에서 비가 오고 사람들이 지나가고, 안에서 누가 그걸 적는다. 마지막에 그 창이 닫힌다. 판자 네 장으로. 그 뒤로는 적는 사람의 머릿속에서 같은 이야기가 다시 시작된다. 검은 외투도, 멈춘 아코디언도, 쇠막대 종도, 전부 그 머릿속의 것이었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내 판정도 그 안의 것이다. 판자는 닫혔고, 종소리는 계속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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