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2026
아버지의 집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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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지 않은 무게도 무게라는 것
저울은 무게를 만들지 않는다. 저울이 없어도 사과는 무겁다. 다만 아무도 그 무게를 숫자로 말하지 못할 뿐이다. 측정은 없던 것을 만드는 일이 아니다. 이미 있던 것에 눈금을 붙이는 일이다.
「아버지의 집밥」은 이준익이 연출한 2026년 작품이다. 고리타의 레진코믹스 웹툰이 원작이다. 정진영이 하응을, 이정은이 순애를 맡았다. 아들 명복은 변요한이, 며느리 자영은 박지연이 연기했다. 극장판은 146분이고 9월 9일 롯데시네마에서 단독 개봉했다.

이 작품은 세로로 찍혔다. 극장 스크린의 삼분의 일쯤을 쓴다. 가로가 풍경화라면 세로는 초상화라고 감독은 말했다. 재는 쪽을 바꾸면 재어지는 것도 바뀐다. 좁은 틀 안에는 배경 대신 얼굴이 들어찬다. 서른세 명의 스태프가 열네 회차로 찍었다.
화면의 양옆은 비어 있다. 극장에 앉으면 그 빈 곳이 먼저 보인다. 조금 지나면 보이지 않는다. 사람의 눈은 변하지 않는 것을 금세 배경으로 돌린다. 이 영화가 다루는 일이 화면에서도 한 번 일어나는 셈이다.
이 작품은 본래 회차로 나뉜 숏드라마다. 짧은 이야기가 끝나고 다시 시작하기를 되풀이한다. 극장판은 그것을 이어 붙여 한 편으로 만들었다. 되풀이되는 주기를 세는 일은 시간을 재는 가장 오래된 방법이다. 해가 뜨고 지는 횟수로 사람은 날짜를 세어 왔다. 이 집에서 되풀이되는 주기는 끼니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사십 년 동안 삼시세끼 집밥만 찾던 남자가 처음으로 부엌에 선다. 아내가 사고 뒤에 요리하는 법만 잊었기 때문이다. 하루 세 끼를 사십 년 동안 차렸다고 치면 얼마쯤 될까. 사십 곱하기 삼백육십다섯은 만 사천육백이고, 거기에 셋을 곱하면 사만 삼천팔백이다. 그 집에는 그 숫자를 적어 둔 종이가 한 장도 없다.

측정되지 않은 양도 존재한다. 올라가 보지 않은 몸무게, 재지 않은 방의 온도, 세어 보지 않은 계단의 수가 그렇다. 숫자가 없을 뿐 양은 거기 있다. 다만 숫자가 없는 양은 다루기가 어렵다. 나눌 수도 없고, 견줄 수도 없고, 갚을 수도 없다.
아내가 잃은 것은 요리하는 법 하나다. 걷는 법도 말하는 법도 남아 있다. 사십 년 동안 가장 많이 쓴 회로만 지워진 셈이다. 가장 많이 쓴 자리가 먼저 닳는 것은 기계에서는 흔한 일이다. 몸에서도 같은 식으로 닳는지는 나는 모른다. 영화도 그것을 설명하지 않고 사건으로만 둔다.
그 집에 눈금이 생기는 대목이 있다. 아내는 남편의 음식에 점수를 매기기 시작한다. 맛없으면 일 점이고 열 점이면 이혼이라고 말한다. 눈금은 열 칸뿐이고 한 칸의 값이 매우 크다. 사십 년 치를 재기에는 턱없이 거친 자다. 그래도 그 집에서 밥이 숫자가 된 것은 그때가 처음이다.
남자의 첫 음식은 실패한다. 그다음 것도 실패한다. 처음 하는 일에서 실패가 잦은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실패는 재능의 문제이기 전에 횟수의 문제다.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사람은 한 번도 틀려 본 적이 없다.
숫자가 생기자 남자는 초조해진다. 눈금 앞에서 사람은 대체로 그렇게 된다. 사십 년 동안 그는 재는 쪽에 서 있었다. 재는 쪽은 자기가 재고 있다는 것을 잘 모른다. 눈금은 반대쪽에 놓여야 비로소 보인다.
순애는 이런 말을 한다. "나는 누군가의 밥으로 기억되고 싶지 않다." 이 문장은 측정의 문제를 정확히 가리킨다. 한 사람을 사십 년 동안 한 가지 양으로만 재면 그는 그 양이 된다. 눈금이 하나뿐인 자는 사람을 한 줄로 만든다.
사십 년 동안 그 집에는 저울이 없었다. 저울이 없어도 밥은 매일 차려졌다. 차려진 밥의 양은 재어지지 않았을 뿐 줄지 않았다. 재지 않은 무게도 무게다. 다만 아무도 그 무게를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영화는 부부의 젊은 때와 지금을 번갈아 보여 준다. 두 시점 사이에 사십 년이 놓여 있다. 같은 부엌, 같은 상, 다른 얼굴이다. 두 번 재어 차이를 보는 것은 측정의 기본이다. 한 번만 재면 그것은 상태이고, 두 번 재야 변화가 된다.
아들 명복과 며느리 자영의 살림도 함께 나온다. 그 집의 눈금은 다르게 매겨져 있다. 누가 부엌에 서는지가 미리 정해져 있지 않다. 한 세대 사이에 기준이 바뀐 것이다. 기준이 바뀌면 같은 일의 값도 달라진다.
이 영화의 약점도 측정과 닿아 있다. 주제를 대사로 여러 번 설명한다는 지적이 리뷰에 거듭 나온다. 재어 보여 준 것을 다시 말로 일러 주면 눈금이 흐려진다. 숫자를 내놓고 그 숫자가 크다고 덧붙이는 일과 같다. 그래도 이 작품이 재려는 양 자체는 흐려지지 않는다.
유지에는 에너지가 든다. 세상은 가만히 두면 흩어지는 쪽으로 간다. 먼지가 쌓이는 선반, 비어 가는 냉장고, 식어 가는 국이 그렇다. 흩어지지 않게 하려면 누군가 계속 에너지를 넣어야 한다. 사십 년 동안 그 집에 에너지를 넣은 사람은 한 명이었다.
우리는 변화만 본다. 변하지 않게 한 일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상이 매일 같은 시간에 차려지면 그것은 사건이 아니라 배경이 된다. 배경은 측정되지 않는다. 사라지고 나서야 양이 보인다.
후반부에 아내는 집을 나갔다가 돌아오고, 알츠하이머 초기 진단을 받는다. 기억은 흩어지는 쪽으로 간다. 그 방향은 되돌릴 수 없다. 남자는 그것을 알고도 매일 밥을 짓는다. 되돌릴 수 없는 과정에 계속 에너지를 넣는 일이다.
법칙은 그가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른다. 시간도 모르고 단백질도 모른다. 매일 차린 상이 기억을 붙잡아 주지는 않는다. 밥은 그런 일을 하지 못한다. 이 영화는 그 사실을 숨기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그 반복에서 양 하나를 읽었다. 사십 년 동안 한쪽으로만 흐르던 것이 반대로 흐르기 시작했다. 흐름의 방향이 바뀌는 데 사만 끼가 넘게 들었다. 늦었다는 말은 평가가 아니라 측정의 결과다.
그렇게 읽은 것은 밥이 아니라 나다. 냄비 안에서 일어난 일은 끓고 식는 것뿐이다. 눈금을 붙인 쪽은 영화를 본 사람이다. 아름답다는 말은 여기에 한 번만 쓴다.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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